안창홍 ' 똥







안창홍 작업노트
AHN CHANG HONG ' WORK 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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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첩 2007/10/31
오늘은, 오래 전부터 맘먹고도 미뤄왔든 일을 실행하였다. 전화 번호수첩을 뒤적일 때 마다, 실행을 하려고 맘먹을 때 마다, 행동을 가로막는 투명한 벽, 몇몇 이름을 지우고 몇몇 전화번호를 지우는 일에 왜 이리 마음이 내키질 않았든 것일까? 오늘은 작정을 하고 앉아 수첩을 펼쳐 든 것이다.빼곡히 적힌 이름과 전화번호를 일일이 손으로 짚어가며 연락이 끊킨지 오래 되었거나 전화 번호가 바뀐 사람들의 이름 위에 까만 볼펜으로 가로줄을 쳤다.

지금 가지고 있는 새 수첩은 십 년을 넘게 들고 다녀 넝마처럼 느들느들해진 수첩에서 금년 봄 옮겨 적은 것이다. 새 수첩 또한 몇 해 전에 옛 제자가 보다못해 사다 준 수첩이라 겉장엔 년도가 2001년이라고 적혀있다. 옮겨 적기 전의 수첩은 가나다 순서가 거의 무시된데다 연필, 볼펜, 사인펜, 붉은색, 푸른색, 까만 색, 선이 굵은 펜, 가는 펜 할 것 없이 그때 그때 잡히는 데로 손에 잡고 기록한 것들이라 남들은 도저히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산만하였다.그러나 뜯어진 낱장을 유리테이프로 붙이고 갈피에 끼워서 까지 들고 다니느라 손때가 묻고 정이 든 수첩.

그, 낡은 수첩의 내용을  새 수첩에 옮겨 적을 때 지워야 할 연락처들을 정리하려 하였으나 그러지를 못하고 고스란히 다시 옮겨 적은 것이다. 이유는 그 속에는 차마 잊을 수 없는 오래된 그리움들이 쌓여있기 때문이었다. 이름들 속엔 외국에 나가 몇 년째 연락이 두절된 친구도 있고 사업이 실패하여 행방을 감춘 친구도 있고 통성명만한 사람, 기억이 안 나는 이름, 가슴속에 묻혀 지워지지 않는 이름도 있고 지역번호마저 옛날 그대로인 아주 아주 오래된 전화 번호도 있다.

낱장을 넘길 때 마다 그 속에 내장되어있는 숱한 사연들, 심지어는 몇 해전 법정투쟁까지 벌인 고약한 이의 연락처도 그대로고, 배신감에 힘들어 했든 믿었든 후배의 연락처도 그대로다. 인간관계라는것은 악연 마저도 쉽게 떨칠 수 없는 끈으로 매듭지워져 있어서 그것을 푸는데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 일 것이다.오랜 세월 동안 사랑과 증오와 우정과 비즈니스와 재난의 상처를 연결 지워줬든 연락처와 이름들,

전화 번호와 이름을 지운다고 기억해야 할 것들 마저 깡그리 잊혀지기야 하겠냐마는 그래도 우연이나마 기억을 되새김 할 수 있는 시각적 환기 장치를 두고싶었든 마음에 썩 내키질 않았든 것이다. 얼마 전에 암으로 세 상을 떤 후배와 선배의 연락처를 지울땐 선배의 잘생긴 얼굴과 너털웃음이 떠 오르며 잠시 숙연해 졌다. 몇 해전에 돌아가신 선생님의  연락처위에 마지막으로 줄을 그으면서 수첩 정리가 끝이 났다. 차마 보내드리지 못하고 마음속에 묶어 두었든 그리움의 매듭을 풀고 당신을 보내드리는 의식을 몇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난 이제서야 치른 것이다.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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