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홍 ' 똥







안창홍 작업노트
AHN CHANG HONG ' WORK 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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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억 한토막 2009/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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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1학년때 미술실에서.
하하 요렇게 쪼매난 소년의 머릿속에도 나름의 자아와 우주는 들어있었든것이다.





며칠 전 부산 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에서 원고청탁 전화가 걸려왔다.
부탁내용은 미술관 소식지에 부산의 원로화가 김덕수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싣기로 했으며 제자인 내가 선생님에 대한 글을 좀 써주셨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생각지도 않든 뜻밖의 부탁이라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러겠노라고 대답하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바쁜 일들 때문에 며칠을 정신 없이 보내면서도 틈틈이 까까머리 시절로 돌아가 선생님과의 기억을 더듬다가 오늘은 원고 마감날짜가 신경 쓰여서 아예 책상머리에 앉았다. 글의 가닥을 잡으려니 생각은 추억의 빗장을 열고 아스라한 시간 속으로 냉큼 달려간다. 안 그래도 얼마 전 문안 전화를 드리고 난 후인지라 훈훈한 여운이 가슴속에 남아있는 상태였다.

“선생님 접니다"
‘”누구?”
“ 창홍입니다, 잘 계셨습니까?”
“아, 창홍이구나! 반갑다야, 축하한다, 오프닝은 잘 치렀냐? 건강은 괜찮으냐?”

늘 변함없는 호쾌하고 따듯한 목소리가 제자의 안부물음에 화답하셨다. 이번 부산 시립미술관 개인전 땐 직접 가든지 틈이 안 나면 아내에게 부탁해서라도 개막식 행사에 꼭 모시고 오리라고 속으로 다짐해 놓고는 정작 당일이 되자 너무나 까맣게 잊어버린 생각할수록 황당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내! 경황이 없어서 그 날 전화도 못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괜찮다, 안 그래도 며칠 후 희국이랑 같이 너 전시 구경가기로 해따”

희국이란 친구는 중학교 미술 부 동문인데 일찍부터 객지 생활한 친구라 중학교시절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선생님 댁을 찾기 시작한 이후, 지금껏 선생님과는 사제지간으로, 친구의 어머니로 각별한 정을 나누는 사이다.

“아…. 예, 그렇습니까? 며칠 후 부산 가는데 그때 희국이랑 같이 모시러 가겠습니다,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선생님”  
“ 아니다 그땐 좋은데 가서 내가 한턱 쏘께”
“앗! 네엣, 그러실 랍니까? 그럼 며칠 후 부산 가서 연락 드리고 찾아 뵙겠습니다"”

여든셋의 할머니이신 당신께서 요즘 젊은이들의 유행어로 한턱을 쏘시겠다니 하하.사제 지간의 시시콜콜하고도 사적인 통화내용을 굳이 이렇게 지면에 옮겨놓는 이유는 중학교를 졸업한지 40년이 넘었지만 제자들에 대한 선생님의 변함없는 정겨움과 격 없고 호방하신 성격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선생님은 나에겐 참으로 각별한 분이시다. 중학교시절 복잡한 가정사정으로 마음 붙일 때 없어 외롭게 겉돌든 나를 늘 관심 어린 따듯함으로 대해주셨다. 학교에서뿐만이 아니라 선생님의 댁에서 보낸 기억들은 잊을 수가 없다. 선생님을 구심점으로 화목하기만 해 보이든 가족간의 사랑과 유대감이 그 시절엔 부러움으로, 철이 들고난 후론 따듯한 기억으로 지금껏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을 만큼 그때, 선생님과 선생님의 가족들과 함께 보낸 시간들은 크나큰 위안이었고 유일한 것이기도 했다.

중학교시절 나는 예민하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또래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으니 쉬는 시간이나 방과후 가릴것 없이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미술실로 달려갔다.거의 하루도 그르지 않고 껌처럼 붙어서 살은 것이다.방과후도 마땅히 갈곳이 없었으니 미술실 마지막 문단속은 거의 내몫이였다. 사생대회라도 있을 땐 며칠씩 수업을 빠지며 그림을 그릴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럴 땐 더욱 살맛이 났고 열심히 열심히 그림을 그려댔다. 요즈음은 어떨지 모르지만 그시절엔,중학교때 부터  운동선수들같이 미술부원들도 소수의 정예부대처럼 그림 그리기에 전력투구 했다.물론 철저한 자율에 의해서였다. 고등학교진학 후 아주 드물게 장래진로가 바뀌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미술부원 대다수가 일찌감치 인생의 목표를 화가로 정해놓은 때문일 것이다. 쉬는 시간이나 방과후 미술 실에 들리신 선생님께선 언제 오신지도 모르게 등뒤에서 “ 다들 열심히 그리고 있구나” 하고 말씀하시며 미술부원들을 격려하셨는데  선생님께선  미술 수업도 재미나고 흥미롭게 시간을 운용하셨지만 미술부 또한 통제나 간섭없이 구속 감을 느끼지 않도록 자유로운 분위기로 이끄셨다.


2층 복도 끝에 붙은 미술 실은 3면 벽 전체가 유리창이라 학교 뒤쪽 구덕 산의 변화무쌍한 사계절이 늘 창을 가득 매웠다. 유달리 벚나무가 많아 봄에는 온 산을 뒤덮은 벗 꽃들이 바람이라도 부는 날엔 눈발이 흩날리듯 아름다움의 절정을 이루었고 가을엔 타는 듯한 붉은 빛이 나의 가슴까지 물들였다.


마지막 겨울방학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저녁햇살이 비춰 더는 창가에서 추위와 계절의 우울함을 달래며 그림 그리기에 몰두해 있는데 뜻밖에 선생님께서 들어오셨다. 그리곤 유심히 그림을 관찰하시더니 “너!. 제법인데, 그림 좋구나” 하셨다.  칭찬 한마디에 엄습하든 추위와 적막감은 어디론가 날아가버리고 소년의 가슴은 갑자기 새가슴처럼 콩닥대며 충만해졌다. 신바람이 난 나는 땅거미가 완전히 내려앉고 넓은 미술 실에 어둠이 가득 차서 사물이 거의 분간되지 않을 때까지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었다.

그날, 그 말씀이 그토록 특별한 감흥으로 나를 고무시킨 이유는 3년 동안의 미술 부 활동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어본 내 그림에 대한 선생님의 칭찬이었기 때문이다.

중학교시절의 내 그림은 주위의 그림들에 비해 늘 완성도가 떨어졌으며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상한 그림이었다. 그렇다고 그림실력이 수준미달이었다는 뜻이 아니라 또래들이 그리든 그리기 방식과는 너무 달랐다는 말이다. 그날 그날 감정의 기복이 그림 속에 그대로 표출되었으며 장난기와 호기심으로 항상 뭔가 새롭고 재미난 구도 잡기와 그리기 방식에 골똘해 있었으니 좋게 표현하면 화폭은 늘 실험의 장이었고 나쁘게 표현하면 난장판이었든 것이다.

풍경화든 정물화든 요상?하게 그리기는 매 한가지였으니 행동거지의 엉뚱함과 요상한 그림이 다른 부원들의 눈에는 당연히 해괴하게 보였으리라. 그 증거로  미술 부 상급학년들의 눈밖에 난 나는  얻어터지는 것이 다반사였는데 이유가 아까운 그림제료를 낭비?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그리기 방식을 멈출 수가 없었다.  미술 대회가 있을 땐 심심찮게 큰상들을 타오는 동료들과는 달리 내 그림은 상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비틀어 그리기와 상복없기는 고등학교때도 마찬가지였다) 내심 나도 상은 받고 싶은 마음에 혼자 남아 상 받은 부원들의 그림을 몇 번인가 흉내 내서 그려보기도 했으나 이내 지루함을 느끼곤 나의 방식으로 다시 돌아갔다.

권위주의와 통제로 학생들을 옥죄었든 그당시 학교의 보수적 울타리 속에서도 미술부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상급생들에게 주기적으로 얻어터지는 것 외에는 만족할 만큼 자유스러웠으며 그 자유로움에 힘입어 미술 실은 언제나 활기와 의욕으로 충만했다. 돌이켜 보면 그런 자발적인 의욕과 열정은 보이지않는 뒤쪽에서  선생님의 교육철학이 튼튼한 버팀목역할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든 것이다. 한창 호기심과 반항 끼 많을 나이라 제법 사고뭉치였든 미술부원들은 선생님의 보살핌과 통 큰 사랑 속에서 철이 들었고 상급학교로 진학을 하곤 제각각 세상 속으로 흩어졌다.

그 후 지금껏 나는 붓을 놓지 않았고 이제 중년의 화가가 되었으니 그 시절 선생님의 칭찬 한마디와 간섭 받지 않은 자유로움이, 자신을 스스로 다스리고 책임져야 하는 화가의 길에 큰 도움이 된 것일 것이다.

세월의 무상함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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