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홍 ' 똥







안창홍 작업노트
AHN CHANG HONG ' WORK 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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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전 '아리랑' 준비를 끝내며, 2012/10/24
  작년 봄에  개인전을 치른지라  좀 늘어지게 쉬고 싶었으나, 느닷없이 또 개인전을 계획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이 지리멸렬한 나라에서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힘에 겨운지, 시도 때도 없이 터져 나오는 울화통과 무력감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지 않고선 결국 화병 때문에 명대로 못살고 나자빠질것만 같은 불안감이, 이년 후쯤 치를 예정이던 개인전 날짜를 앞당기게 하고야 만 것이다. 이 지옥 같은 현실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정신없이 바빠지는 것 뿐, 다른 방도가 떠오르질 않았으니까.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개인전 준비가 시작은 됐지만, 일단 작업에 불이 붙자 산만하고 불안정하던 정신은 한쪽 방향으로만 완전히 몰입하기 시작했다. 어스름 저녁녘으로 착각하고 마당에 나서면 다음날 새벽이었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잠까지 반납한 채 스스로를 섬처럼 고립시켜갔다. 외부소식의 유일한 창구인 인터넷 사이트에도 무관심해졌으며 종착점 없는 주변과의 정치적 논쟁에서도 물러났다. 그러는 사이 바깥세상 돌아가는 일은 아득히 망각의 어둠 속으로 떠내려갔고, 마음속엔 어느 정도 평정이 찾아왔다. 덕분에 그림과 씨름하며 보낸 지난 몇 달은 행복했다. 물론 잠잠하던 우울증이 되살아나  또 다른 나락이 나를 끌어당기긴 했지만 빈번히 찾아오는 친구 같은 사이니 견딜만한 동거였다.

허리가 삐긋했을 때도  빠듯한 일정 때문에 쉬지도 못한체 꽤 긴 기간을 붓을 들고 요상한 꼴로 어기적어기적 사다리를 오르내렸는데 무지 아팠으나 그것 또한 꾸욱 참아냈다.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유한하고 고통스러운 것이니, 이까짓 물리적 통증쯤이야 세상 돌아가는 꼴을 바라보며 생긴 화병에 비하랴 싶었다. 암튼 그런 뜻밖의 복병과 긴 장마, 무더위를 견디며 작업에 열중한 나머지 며칠 전 마지막 작품에 서명을 끝내었다.

이번에 열작한 작품들은 사진 자체를 작품으로 활용하거나 사진의 모티브를 회화적 방식으로 변용해서 그린 것들이다. 이 작품들은 70년대 후반 '가족사진'연작을 시작으로 '봄날은 간다'연작, '사이보그'연작, '부서진 얼굴'연작, '49인의 명상' 등의 제목으로 지속적으로 발표해오던 것의 연장선상에 있다. 나에겐 생애를 투자해서 완결로 가고 있는 각별하고 애정 어린 주제들인데, '기념사진'만을 묶어 연작으로 선보이는 개인전은 이번이 처음이다.

역사의 주체이면서도 정작 역사의 장 속에서는 부재한 평범한 사람들, 이들의 이미 수 십 년이 지난 빛바랜 기념사진들을 우리의 험난했던 근, 현대사 속의 사건들과 겹쳐보는 행위로 밑그림(에스키스)이 시작된다.
본격적인 작업은 캔버스 위에 사진을 정확하게 옮겨 그리는 일과 인물들 마다(마치 회상에 잠긴 듯이) 눈을 감기는 것으로 일차 작업이 마감된다.
   
인물들의 눈을 감긴 이유는 우수와 연민, 비애감 혹은 내면으로 침잠된 듯한 시각적 효과와 사진이 가진 고유한 정서(기억의 환기, 존재에 대한 증명)를 뒤집어 존재의 부재를 의미하기 위함이다.
기구한 역사의 삭풍을 어쩔 수 없이 견디며 헤쳐 갔을 지친 영혼들의 상처와 권력의 폭압이 빚어낸 시대의 우울을 아울러 상징할 수 있는 얼룩(찢긴 흔적, 혈흔자국, 빛바랜, 그을린, 탄흔자국 등)을 일차적으로 완성된 흑백그림 위에 가해하듯이 중첩시킴으로 해서 사진 속 인물들을 그 시대의 현실 속으로 불러내어 이미 경험했거나 경험해야 할 사건들 속으로 끌어들인다. 앞서 언급한 여러 가지 의미의 상징들이 회화적 기법으로 화폭 위에 채워지면 전체작업은 마감된다.

과거의 시간 속에서 끄집어 낸 한 장의 사진에 포개진 가해(?)의 흔적(얼룩)과 눈을 감기는 행위를 통해서 광기와 도발의 역사- 그 뒤안길에서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허깨비처럼 사라져 간, 혹은 이 순간 노구를 이끌고 생의 마지막 언저리를 더듬고 있을 이들의 지난한 삶에 대한 연민을, 한과 상처를, 아직도 끝나지 않은 현재진행형인 이 시대의 야만과 불길한 미래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지나친,
   선바위 마을의 저녁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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