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홍 ' 똥







안창홍 작업노트
AHN CHANG HONG ' WORK NOTE


회원가입 로그인
    개인전 `나르지 못하는 새`(2015 아라리오갤러리)에 부쳐. 2016/10/09
나의 개인전 <나르지 못하는 새>의 출품작은 1972년 초기작부터 2015년 작품까지 시기별로 엮여 있다. 초기작에서는 한 작가가 사적 독백으로부터 사회적 관심사로 시선을 확장시켜 가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실험했던 단계를 보여준다.

이 시기의 작업은 <위험한 놀이> 연작, <가족사진> 연작, <새> 연작, <사이보그의 눈물> 연작, <49인의 명상> 연작 등으로 발전해 나간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달동네 풍경>(1973)이나 <매춘>(1976), 회색빛 도시의 삶을 그린 <인간 이후> 연작(1979), 엄혹했던 군사 독재 시절 핍박의 고통을 그린 <절규>(1989), 광주 민중 항쟁을 소재로 만든 테라코타 두상들, 소비문화가 움트던 시절 성 상품화를 빗대어 그린 <우리도 모델처럼>(1991), <건달>(1996) 등등, 지금까지 생애에 걸쳐 지속적 관심으로 조형화하고 있는 부당함과 부조리의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이 초기작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대부분의 작품이 권력과 지배계급의 반대 항에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암울한 사회상을 녹여낸다.


지배계급의 반대 항에 서서

연작 중심으로 발표하는 나의 작업을 큰 덩어리로 구분하자면 한 줄기에서 뻗친 두 갈래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둘 다 주변부 사람들 이야기인데, 그 중 하나는 착취와 희생의 역사 속에 잊힌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아가는 이웃이 처한 현실의 상황을 통해서 바라보는 세상 이야기들이다. 오래 전에 노트에 적어 놓았던 작업에 대한 단상을 간추려 내어 이곳에 옮겨 본다.

_나는 역사의 뒤안길, 잊힌 민중들의 삶으로 역사를 바라본다. 그리고 이들의 삶을 기록물이나 사진 자료들을 수집하고 들추어내어 차용하거나 변용하는 방식으로 재해석해 낸다. 역사의 장막, 망각의 늪에서 이들을 끄집어내어 일종의 제의를 치르는 것이다. 제작 과정 중 이들의 초상들 속에, 폭력과 야만의 역사와 삐뚤어진 권력에 대한 비판과 분노를 슬며시 집어넣는다. 그것은 암울한 회색빛 미래에 대한 경종이자 살아남은 자들의 또 다른 희망을 위한 의식적 행위이다.

또 하나의 시선은, 앞서 이야기한 현재를 숨 가쁘게 살아가는 주변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백화점 점원, 부랑아, 문신가게 사장, 농부, 오토바이족, 동성애자, 간호사, 친구들, 주막집 여인, 걸인 등등, 생활 속에서 늘 스치고 마주치는 사람들, 이들의 육체와 눈빛을 통해서 자본과 성(性), 권력과 탐욕, 욕망과 허구에 대한 것을 이야기한다.

야만의 문명과 야만의 정치, 청산되지 못한 과거사와 파열음, 비열한 수단으로 움켜 쥔 권력과 부, 착취, 불합리하고 모순된 시스템과 사회 현상들, 무지와 집단 최면. 초상화 속에 이런 모순과 불합리를 정교하게 반영한다. 이 부분을 나 스스로 ‘안창홍식(式) 정치적 발언’이라고 이야기 한다.

이렇듯 내 작업의 대부분은 과거와 현재를 오르내리며 망각의 그늘에 묻힌 진실과 현재 삶의 부조리에 주목한다. 특정 사건의 큰 덩어리에 가려진 작은 조각들, 희생되거나 말거나 관심 밖으로 멀찌감치 밀려나 있는 소시민들의 개인사에 집착한다. 197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생애를 걸고 천착해 오고 있는 <아리랑> 연작이 바로 그런 류의 작업 중 하나이다. 

 <아리랑> 연작 중 <기념사진>(1979~) 시리즈를 그리기 시작한 지 얼마 후에 친구 집에서 들춰본 낡은 사진첩 속에서 빛바랜 사진 몇 장을 발견했다. 일제의 강제 징용에 끌려가는 학도병인 남편과 하얀 한복(흑백사진 속의 흰 빛이 현실 속에서도 흰색이었으리라 느껴졌다)을 차려 입은 어머니의 기념사진 한 장! 이 비통한 한 장의 사진은 쇠망치처럼 내 가슴을 내리쳤다. (…)

이 젊은 부부의 우울하고 빛바랜 사진 위에, 사진의 일차원적인 특성을 뛰어 넘어 역사의 폭력에 강탈당한 청춘과 생이별의 아픔을 조형 언어로 아로새기기 위해 고민과 노력을 기울였다.
이번 전시에도 포토콜라주로 제작한 <아리랑> 연작을 여러 점 출품했다.


고발의 메시지

또 다른 갈래인 인물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작업을 위해 모델을 구할 땐 직접 거리로 나선다. 간혹 지인에게 소개받기도 하고, 즉석 프러포즈로 이루어지기도 하는데, 직접 프러포즈할 때가 더 많다. 사실 직업 모델이 아닌 바쁘게 살아가는 생활인들을 시골 작업실로 불러들이고 남녀노소 관계없이 옷을 입히거나 벗기거나 하는 행위 자체가 우리 문화 속에서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필요 이상의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빼앗긴다.

사람들도 직업 모델이 아닌 사람들의 옷을 어떻게 벗겼는지에 대한 관심이 더 많다. 어쨌든 그런 과정의 노력을 통해 의도된 포즈로 앉거나 서있는 모델들의 몸을 통해 모멸과 불화의 이 시대를 증언하고 발언한다. 그렇게 2008년부터 제작한 인물화 <베드 카우치> 연작을 통해 몸의 진실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관음증적 시선을 위한 관능적 몸과 포즈가 아닌 냉혹한 현실을 견뎌내는 삶의 몸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다. 삶의 또 다른 시선인 <사이보그의 눈물> 연작, <49인의 명상> 연작들로 전체 전시가 구성됐다. 위의 작품들과 동일선상에 있는 또 다른 작품으로 가장 최근에 제작한 <야만의 시대>에 대한 작업의 단상도 옮겨 놓는다.

_2015년 9월초 터키 남서쪽 휴양도시 보드룸(Bodrum)의 해변 모래밭에서 파도에 떠밀려 온 시리아 난민 아이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충격적인 사진과 함께 전해졌다. 이 끔찍하고 가슴 아픈 사건에 대해 매스컴과 사람들은 한동안 난리법석을 떨어댔다. 그리곤 잊혀졌다. 물론, 사람들 저마다의 가슴 속에는 각인되어 남아 있으리라.

어른들의 더러운 욕망에 의해 유린당하는 어린아이들의 생명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 죄악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당장 이스라엘의 무차별 폭격으로 수도 없이 죽어 나가는 파키스탄 어린이들을 보라. 가깝게는, 이 넘쳐나는 풍요(?)의 대한민국에서 부모들의 생활고로 인한 동반 자살에 희생되는 아이들까지! 나는 오래전부터 이런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고발적 메시지를 담은 상징적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사실 작품 구상을 시작하고 입체로 작품을 제작한 해가 2009년이니까 몇 년이 지난 지금 평면 전시를 위한 사진 작품을 만들었으니, 각각 독립적이면서도 하나로 연결된 두 개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는 꽤 오랜 기간이 걸린 셈이다. 의료용 아기 인형을 구입해서 해체하고, 내가 의도한 형태로 재조립하고 시각적 효과를 위한 액션을 가하면서 실제 가해자처럼 마음은 힘이 들었다.

나는 작업을 시작하면서 해체된 아기 인형의 형상을 통해 강압된 희생의 끔찍함과 메시아의 숭고함이 동일선상에 올려놓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작업했다. 그런 뜻으로 만들어진 작품을 눈에 잘 띄는 작업실 벽에 걸어놓고 오며 가며 몇 년 동안을 바라만 보았다. 6년째 되던 어느 날, 작품의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나는 빛을 모색하기 위해, 자연광 속에서 각각 다른 시간대에 여러 컷의 사진을 찍어 보관해 두었다. 여러 날 동안의 인내심이 필요한 무척 길고 지루한 작업의 과정이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 터키 해변의 충격적 사건에 대한 소식을 접하면서 발표하기에 적절한 때라 생각하고 완성을 위해 매진한 것이다.

저장해 놓은 여러 장의 사진들 중 내 의도에 가장 잘 부합된 원판을 한 장 골라냈다. 여러 번의 실험을 거쳐 대형 캔버스에 피그먼트 프린트로 옮긴 후, 적절한 부위에 레진을 부어, 짓이겨진 어린 생명의 가녀린 육체 위를 번들대는 폭력의 광기가 뒤덮여 흘러내리는 듯한 효과를 주는 방법으로 작품을 완성한 것이다.

나는 늘 그림 속엔 시대정신이 녹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먼 훗날 한 작가의 그림을 통해서 그 시대의 통증을 거울처럼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모든 그림이 시대의 반영물이라면 보다 적극적인 참여가 바람직한 화가의 자세라는 생각이다. 이 세상의 미술 중 정치성을 띠지 않은 미술이 어디 있던가! 나는 화가의 시선에 의해 기록된 저항과, 타협하지 않은 자유정신이 깃든 삶의 미술이야말로 이 시대의 화가가 남겨야 할 유산이기도 하고 화가로서의 자존을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전 세계를 수렁으로 빠트린 금융자본주의의 폭력 앞에 몰락해 버린 모든 정신적 가치들. 소중한 모든 가치들을 돈의 똥꼬 아래로 깔아 뭉개 버린 물신주의의 힘과 더욱 피폐해진 우리들의 삶. 이 시대의 미술이 진정(!)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데 일조할 수 있기나 한 것일까?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이 의구심에 대해 흔쾌한 대답을 찾을 수 있기나 한 것일까? 전시는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은 불안한 시대를 살아 내고 있는 한 작가의 우울하고 자조적인 독백이고 근심 어린 세상을 향한 내뱉음이다.


   '눈먼자들'blindness연작을 시작하며
   "나는 화가라서 행복한가?"
     


Copyright 1999-2017 Zerobo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