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홍 ' 똥







안창홍 평론모음
AHN CHANG HONG ' CRITICIZE


회원가입 로그인
    퇴폐적 매력-그 쓸쓸한 시선 /박 석 태 2006/04/27
-안창홍 개인전 감상기

이 글을 쓰려하는 내 머리 속은 우울을 머금은 먹구름처럼 터질 듯하다. 안창홍, 그의 그림을 대한 지가 벌써 7, 8년은 족히 되었음에도 그의 그림에 대해 얘기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버거울 거라는 생각에 선뜻 글을 풀기가 어렵다. 한 작가에 대한 글이 그리 쉽게 나오는 법은 아닐 테지만, 더욱이 아직 진행형인 작가에 대한 서술이 더욱 글쓰는 이를 난감하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나는 안창홍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의 그림을 볼 때면 언제나 느끼곤 하던 그 쓸쓸함, 그러면서도 폐부를 찌르는 그 무엇. 지독히 외설적이지만 마냥 그렇게만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뒷맛. 조잡한 듯하지만 흉내내기는 어려운 그림, 언제나 뒤통수를 치는 작가적 상상력. 대체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던가.

세상에 대한 증오와 깊은 강박이 느껴지는 그의 그림 앞에 서면 나는 심기가 불편해진다. 너무 솔직해서일지도 모른다. 일상에서 흔히 지나치는 문제가 그의 화면 안에서는 거친 말투로 우리에게 다가선다. 그냥 묻어두고 지나치려 하는 일마저도 거침없이 까발리는 화면은 그래서 통쾌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불편해지기도 하는 것이리라. 잠재의식 저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살아남은 자'로서의 독설을 안창홍이라는 사람이 대신 지껄여주는 듯한 기분에 잠시 숨통이 트이기도 한다. 거짓된 관념과 방탕스러운 자유, 그리고 세상에 대한 무관심을 지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이른바 모더니스트의 그것들과 나란히 그를 놓으면 이런 생각은 더욱 커지곤 한다.

파리, 똥, 가면, 쾡한 눈빛 등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이런 어두운 형상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우리의 삶을 지그시 누르고 있는 옴싹달싹하지 못하게 만드는 거대한 힘을 느낄 수 있다.

안창홍의 그림은 '사회'를 떠나서 이해하기에 어렵다. 즉 그의 그림은 보는 우리에게 '사회'를 생각하게 만든다. 안창홍은 그러나 사회를 직설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언제나 은유적이고 우화적인 변용을 통해 우리 사회 근저의 모습을 제시한다. 그렇다. 우화적인 그의 그림 앞에 서면 우리는 그가 보내는 세상에 대한 조롱을 느낄 수가 있으며 곧 공감하곤 한다. 그것은 이 뒤틀린 사회를 반어적으로 까발리는 수법에 대한 동감의 의미라 생각한다. 그가 1990년 이후부터 사회적 문제와 결부된 <위험한 놀이>, <우리들의 일상>, <악몽> 등 일련의 작품들을 내놓기 시작하면서 시종 이러한 우화적인 시도는 그를 가리키는 표제어처럼 쓰였다. 이번 전시에서의 <화가의 똥>, <권력>, <씹> 등의 작품은 그러한 작업의 연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화가의 똥>에서의 무지개 빛의 똥은 미술가의 자조적인 자존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사회를 이루는 하나의 문화 계층인 화가의 지위에 대한 자전적 소외감을 통쾌한 반전으로서 사회에 대한 조롱을 재치 있게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똥'과 '씹'이라는 글씨를 이루는 수많은 파리 떼는 바로 일그러진 권력과 욕망으로 끝없이 엉겨붙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다. 우리는 거기에서 우리의 욕심과 자본주의에 물든 '욕망'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안창홍의 작업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또한 고급문화의 속물 근성에 대한 비판적 공격이자 미술의 사회화에 대한 정당한 요구의 형식이다. 이것은 앞서 예로 든 <화가의 똥>에서 볼 수 있다.

안창홍의 그림은 그 형식상 팝아트의 명료한 분위기와 흡사한 듯 보이지만, 내용 면에서 사실은 그와 정 반대편에 위치한다. 실제로 팝아트란 구시 스미드(Edward Lucie-Smith)가 말했던 것처럼 양식(style)이 없는 것이고 계열화에 적대적인 예술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창홍은 참여의식이 결여된 팝아트의 무관심과 대중적 이미지의 끊임없는 증식과 재생산을 통한 무의미한 엔트로피의 증가와는 상극점에 위치해 있다. 그의 상투형은 팝아트의 그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심각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창홍의 상투형은 팝아트보다는 '키치(kitsch)'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오늘날의 한국 사회가 가진 뒤틀리고 이지러져 기형적으로 보이는 현상을 담아내는 데 키치적인 표현보다 더 타당한 것이 있을까 싶다. 키치라는 용어 자체에 담겨 있는 '나쁜 취미'와 '저급문화에의 지향'은 세기말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속성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안창홍이 채택하는 또 하나의 회화적 장치는 에로티시즘과 그로테스크이다. 이들은 그의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일관되게 흐르는 회화적 장치이다. 퇴폐적인 에로티시즘은 오늘의 우리 사회를 읽는 또 하나의 열쇠말로서 그는 예의 우화적인 어법을 통해 성(性)에 대한 욕망을 이야기한다. 그가 줄곧 가져온 관심은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시대의 성과 성 욕망의 사회적 조건과 그 소비의 형식이며, 나아가 그의 의식 속에 작용하고 있는 성 관념이 어떤 방식으로 작품 속에 반영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성은 숭고하거나 고상하지도 않다. 그것은 마치 밥을 먹는 것처럼 일상적인 행위이며, 그렇기 때문에 생산의 과정으로서의 성이 아니라 소비, 파멸로서의 성이 두드러진다. 감각적이고 파괴적이며 약탈적이면서도 허망한 성의 소비에 대한 노골적이면서도 공격적인 그의 그림은 그 이미지가 주는 신랄함 때문에 생경하거나 부담을 주는 부분이 있지만 한편으로 그 속에는 폐부를 찌르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이번 전시의 <술과 혀>, <혀와 혀>, <탱탱한 청춘> 그리고 <응큼한 남녀> 등은 이러한 안창홍의 입장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전의 <우리도 모델처럼>에서 보았던 에로티시즘의 퇴폐적 매력이 그대로 보여지고 있다. 이들 작품은 은밀한 성적 행위의 교환이 느닷없이 공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도 암시적 연출에 의해 성을 노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변태적으로 보이기조차 한다. 그러나 그림들 속에는 두 사람을 정서적으로 연결시켜 주는 애정이란 없다. 차갑고 우울한 청색 배경과 자극에 대해 냉정하도록 무관심한 두 사람의 표정과 태도, 핏기 없는 얼굴은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죽음의 불길함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한 그의 그림 속의 인물들을 바라보는 우리는 왠지 모를 불안함과 훔쳐보고 있다는 의식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또한 작품 안의 인물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까닭 모를 안도감에 싸이기도 한다. 이런 점이 그의 작품을 더욱 을씨년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요인이다. 그림 속의 인물들이 성에 몰두할수록 그들은 그것에 무기력한 자신을 발견할 뿐이다. 그 무력감이 그들을 철저하게 대상화해 버림으로써 그들의 영혼은 실종되고, 그것이 증발해 버린 자리에 메마른 육체만이 쓸쓸하게 방치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에게 마치 퇴화된 꼬리처럼 따라 다니는 정서를 반영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에로티시즘에는 언제나 부재의 그림자가 따라 다닌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안창홍의 그림은 사회를 떠나서 이해할 수 없다. 그가 담고 있는 에로티시즘 역시 사회성의 연장선상에 위치한다. 이 말은 다시 정치성을 띤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그가 추구하는 에로티시즘의 본질인 것이다. 즉 그가 구사하는 퇴폐적 표현 방식의 이데올로기적 측면, 성의 철저한 소비와 확대를 통한 성 이데올로기의 전면적 노출에서 그 정치성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위선된 금욕에 의해, 원죄의식에 바탕한 수치심의 명분으로 은폐되는 가운데 지하에서 증식해 온 성의 담론을, 육체에 대한 정신의 위계적 우월성을, 욕망이란 이름 아래 확대 재생산되어 온 소비문화의 말초적 감각을 다 같이 문제삼는 것에서 나타나는 저항이며, 이 반항의 방법으로 그는 방탕과 퇴폐, 타락의 언어를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에서 타락과 퇴폐를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일차적인 것이 불과하며, 우리는 그것 너머에 있는 우리 시대의 위기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 성의 상품화는 이제 육체를 사고 파는 차원이 아니라, 육체를 상징하는 모든 거울이 사자져 버린 사이버 공간 속에서 단지 손가락 끝에서 분열적 오르가슴을 경험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안창홍의 사회성을 드러내기 위한 또 하나의 시도는 아무 관계없는 사물들을 한 화면 속에 구성하는 이른바 '데페이즈망(d'epaysement)'이다. 예를 들어 <여자2>와 <남자1>에 나타나는 파리 떼는 현실의 한 단면을 반영한다. 이러한 수법은 초현실주의에서 빈번하게 이용되었던 방법인 바, 그의 작품을 초현실주의적이라 부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파리와 사람 등은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늘 접하지만-혹은 우리 자신이기도 하지만-한 화면 안에서는 매우 생소하게 보인다. 그것은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는 돌발적이면서 동시에 심리적 불안을 조장하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불안, 퇴폐, 화려함, 독설, 변용 등은 그를 떠올리면 늘 동원되는 수사들이다. 그는 때로는 역설적으로, 때로는 그로테스크한 어법으로, 때로는 당황스러울 만큼의 독설로써 오늘의 우리 사회를 이야기해 왔다. 그럼에도 그의 그림을 등지고 나올 때면 나는 늘 그가 가진 세상에 대한 애정을 떠올린다. 그는 자신만의 어법으로 세상에 대한 조롱과 독설을 퍼붓지만, 그의 눈은 언제나 열린 감각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애정이 없이는 불가능하며, 우리가 그의 그림에 대해 애정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얼굴과 몸, 유령들 그리고 화가의 생애에 관한 얘기/성완경
   얼굴, 시선의 장소들 /박영택 [3]
     


Copyright 1999-2020 Zerobo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