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홍 ' 똥







안창홍 평론모음
AHN CHANG HONG ' CRITICI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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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굴과 몸, 유령들 그리고 화가의 생애에 관한 얘기/성완경 2007/10/08
안창홍 정복수 2인전에 수록된 서문중 나의 작업에 관한글만 짤라서 옮겨놓는다.
(글의 제목은 두작가에 관한 두편의 글을 묶어서 정한것이라 나에 관한 글에만 붙여놓기에는 조금은 맛지않다)


안창홍의 똥과 정복수의 창자. 더러운 똥과 차가운 별. 창자 속의 더러운 똥이 보지하는 맑은 영혼과 자존. 똥과 별과 창자에 관한 한 스스로를 지존이라 생각하는 두 사람의 전시가 열린다. 1976년 부산현대화랑에서 2인전을 연 이후 31년 만에 다시 짝이 되어 여는 전시이다. 과연 볼만할 것이 될 것인가.
기획의 과정이나 속내를 잘 모르나 이미 그 자체만으로 주목거리가 될 요소는 있다고 보인다. 두 사람 다 이 점에서 이야기꺼리가 될 만한 공통점과 이질점을 충분히 지닌 작가들이다. 둘 다 반골기질과 변두리 작가성(아웃사이더 기질)이 세고 시류에 영합하지 않은 채 오직 그림 하나로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걸어간 작가이다. 작업량이 만만치 않다는 점에서도 공통된다. 두 사람 다 고교 때 학교를 중도 포기하고 그림에 몰두하기 시작했고(정복수는 그러다가 나중에 늦은 나이에 갑자기 홍익대에 입학했다) 한 사람은 밀양(안창홍) 또 한 사람은 의령(정복수) 출신인 이 두 예비 작가가 만나게 된 것은 작업실이 있던 부산에서였다. 부산서의 2인전은 두 사람 모두에게 첫 전시였던 것으로 안다.  
나는 80년대 초반에 이 두 작가에 대해 각각 글을 쓸 기회가 있었다. 그 직접 인연이 83년인가 84년에 서울미술관에서 있었던, 그 해의 가장 뛰어난 젊은 작가를 평론가들이 한 사람씩 추천하여 열리는 문제작가전이었다. 여기서 나는 두 작가들의 작업을 처음 보았고 그리고 그 후 두 사람의 작업장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2.
안창홍이 79년에서 82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그린 흑백의 <가족사진>연작으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 봐도 그 연작들은 대단히 힘이 있고 깊은 정서적 울림을 준다. 그에 관해 80년대 이후 몇 차례 글을 쓰게 된 것이나 또 그가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 들어오게 된 인연이 이 연작으로부터였다. 가족사진은 그의 개인적 삶과 우리의 근대사 양쪽에서 모두 강열한 심리적 울림을 촉발하는 인자이며 또한 오늘에까지도 그의 작업의 심층에 걸려 있는 주술을 엿보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최근에 그가 크게 인화 출력한 옛 사진들 위에 그리는 작업에 집중하는 것도 그 연장선상일 것이다. 이 작업들은 사진을 본격적으로 활용하는 점에서 더욱 집중성과 일관성을 보이고 있는데 칼을 대기도 하고 회화적 작업을 추가하기도 한 것들이다. 작가는 그 결과를 지난번 사비나미술관 개인전에서 다량으로 보여주었다. 이번 전시는 사진 꼴라주 작업이란 점에선 그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그와는 또 다른 진일경을 보여준다.  

<봄날은 간다>연작과 <기념사진>연작, 그리고 <얼굴>연작으로 표기되는 전부 15점 안팎이 되는 이 작품들은 최근 8월과 9월 사이에 제작한 것들이다. 사진에 대한 그의 관심은 오래 되었다. 증명사진 작업은 70년대 후반부터이다. 가족사진도 앞서 말했듯이 그가 계속 집착하는 소재이다.  그 외의 사진들은 대개 골동가게와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서 수집한 사진들인데 50년대 사진이 주종을 이룬다. 대략 5,60년 전 사진들이다. 사진 이미지 꼴라주 작업은 그가 1979년 <인간 이후> 연작에서 처음 시도한 것이다. 그 후에도 간헐적으로 계속해오다가 최근에 들어 특히 2001년 이후 더욱 본격적으로 사진작업을 집중적으로 해왔다. 지난번 사비나미술관 전시에는 사진-칼질-꼴라주 작업과 사진-채색 작업이 다량으로 선보였다. 최근의 작업에서 그는 이 사진들을 확대 인화(대개 3벌 인화)하여 이것으로 꼴라주 작업을 한다. 사진을 오려내고 덧붙이며 중첩시키기도 하고 사진 위에 날카로운 커터로 생채기를 내고 그 가장자리의 인화지 표면을 말아 올려 깃을 세우고 그 안쪽은 드로잉 잉크로 검정색 혹은 핏빛으로 칠하기도 한다. 그 잉크는 벌어진 균열선 밖으로 흘러내리기도 하고 화면 위 여기저기에 얼룩을 남기기도 한다.

이번 전시작에서 매우 흥미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이 사진들이 비록 칼질을 하고 그 위에 드로잉 잉크를 흘리거나 덫 칠했지만 이 같은 ‘훼손’이 인물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꼴라주 된 칼질 자국이나 덧칠에도 불구하고 사진 자체의 존재는 훼손되지 않았으며 훼손의 흔적들은 인물과는 따로 비껴 흐르는 느낌을 준다. 훼손의 층위와 사진의 도상의 층위는  마치 서로 다른 공간에 속한 것 같고 그것이 인식론적 관조의 공간과 여유로움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만큼 해방되었다고 할까 자유로운 것이 느껴졌다. 자기 자신을 혹은 자신의 가족사를 바라보는 시선에 여유와 깊이가 생긴 것일까. 비껴 흐르는 선들이 그것들과 사진의 도상 사이에 무심하고 자유로운 관조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흠집을 내거나 상처를 낸 선들이 사진과 그것을 보는 시선 사이에 일정하게 시각적인 방해의 장치로 기능하면서 대상과 우리의 시선을 다 같이 해방시키고 사진에 새로운 깊이를 부여하고 있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칼질과 접합선들이 사진 속 존재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에 새로운 공간적 시간적 배치와 연출의 차원을 부여하면서 다양한 표정과 은유로 읽힌다는 것은 그의 이번 작업의 중요한 성취이다. 훼손의 공간적 배치와 조형적 처리가 조망의 차이를 만들어내고 감정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칼질과 꼴라쥬는 거의 무심한 듯 아주 편안하며 전혀 조잡하지 않다. 완벽하게 하나의 호흡으로 통일되어있다. 주의해보면 세 가지 연작 사이에 차이가 있다.

<기념사진> 연작 3점은 각각 그 자신과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진을 소재로 한 것이다. 그것들은 치유가 어려웠던 오랜 고통과 상처만큼 깊고 어두운 균열들로 패여 있다. 세 작품 모두 칼질 자국과 균열, 얼룩 등이 있으나 그 양상이 다르다. 경찰군복을 입은 아버지 쪽은 특히 더 무겁고 누더기 기운 자국 같은 깊은 균열들로 포박되어 있다. 피가 튀긴 자국 같은 붉은 얼룩과 반점들도 있다. 얼마나 많은 난투극이 이 작가의 생애 내내 있었던 것일까. 어머니 사진은 핏자국은 거의 없으나 더 깊고 침통하다. 깊고 결정적인 칼자국이 마치 깊이 패인 눈물자국처럼 그 아름다운 얼굴을 가로지르고 있다. 고등학교 교복 차림의, 교모를 쓴 젊은이의 초상은 마치 면도날로 한숨에 죽죽 그은 것 같은, 혹은 충격이 가해진 유리창의 균열 같은, 날카로운 직선의 균열들과 그것들로부터 흘러나와 일정하게 한 쪽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붉은 드로잉 잉크 자국이 있다. 이 균열은 얼굴 자체에 가해진 훼손이라기보다는 어떤 겹쳐서 덧 씌워진 (마치 유리창 같은) 별도의 표면의 균열처럼 보이며 날렵하고 현대적이고 미적이다. 앞의 것 두 사진의 균열이 검은색이고 이미 과거에 속한 느낌을 준다면 뒤의 것은 현재형이고 피부에 그어진 깊지 않은 자해 자국 같기도 하다. 직선적 균열의 방향과 구성 그리고 붉은 자국들에서 추상 패턴이나 디자인 같은 미적 쾌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처럼 세 그림에 차이가 있다.

<봄날은 간다>연작과 <얼굴>연작은 그가 수집한 사진들에 기초한 작품들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것들은 골동가게나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서 수집한 익명의 옛 사진들이다. <기념사진>연작과 달리 이 연작들에서는 좀 더 자유로운 미학적 실험의 여유를 느낄 수 있다. 칼자국과 꼴라주가 만들어내는 다양한 균열선들과 중첩의 흔적들은 거의 사진 이미지의 내용과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마치 추상적이고 미학적인 유희처럼, 느슨하고 여유롭게, 심각성을 떨구어낸 채 무심히 (무관심성의 폭력으로) 그어진 듯 보인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만약 의미적 차원을 묻는다면 그건 그닥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해보면 꼭 그렇지 않기도 하다. 그리고 그 점이 나의 눈길을 더욱 끈다. 이를테면 한 중년부부와 두 어린아이들의 초상인 <봄날은 간다’3>에서 꼴라주와 칼자국들 그리고 부분적으로 뜯어낸 인화지의 흔적들은 놀라우리만치 풍부하고 깊은 울림을 이미지에 부여하고 있다. 거의 한편의 영화를 떠올릴 정도의 풍부한 환기력이다. <얼굴’1>의 여자 얼굴을 좌우를 규칙적으로 가로지르며 쌓아올려진 거의 폭력적인 선들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하나의 서사를 우리가 자유롭게 구성할 수 있는 기표로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얼굴’3>의 정면을 응시하는 더 클로즈업되고 크게 눈을 뜬 여인의 얼굴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다. 그 응시는 매우 크고 강력한 감정적 환기를 우리들 속에 불러일으킨다. 소녀와 소년의 얼굴인 <얼굴’4>와 <얼굴’5>도 주의해보면 얼굴 위에 겹쳐진 균열선 혹은 봉합선의 형태에서 주인공의 삶이나 성이나 연령에 연관될 수 있는 어떤 형상성을 발견하게 된다.  

3.
안창홍에게 얼굴이나 초상은 무엇이었을까? 사진은 그에게 무엇일까? 안창홍은 왜 사진과 얼굴, 가면 등에 집착하는 것일까. 사진은 개인사와 보편사 어디에서나 크게 중요한 기억과 심리의 환기물이다. 한 장의 사진은 그 자체는 세월의 저 뒤쪽에 존재하면서도 바로 그 시대의 개인적 재난, 사회적 재난, 시대의 우울을 놀랍게도 여실하게 현실로 되살려내는 마법사라고 작가는 말한다. 안창홍이 사진에 집착하는 것은 우선 이 때문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사진은 본질적으로 심리적 문제이다. 곧 사로잡힘의 문제이다.
얼굴에 대해서도 비슷한 얘기를 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모든 얼굴은 혼백이고 가면이다. 모든 가면-얼굴은 힘의 서식처다. 모든 가면-얼굴은 폭력적 힘을 응축하고 있고 우리를 흔든다. 어느 특정 얼굴이 아니라 모든 얼굴에 대해서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다. 왜냐면 모든 얼굴은 가면이고 기호이고 힘이고 그리고 살아있건 죽어있건 혼령, 혼백이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는 그 혼령과의 교류, 힘과의 교류이다. 안창홍의 작업이 지속적으로 그리고 본능적으로 집중하고 있는 것은 이미지의 이러한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이러한 작업의 출발점이 되는 가족사진 연작 중 하나인 <가족사진>(1980)에 등장하는 가면화한 얼굴들은 특히 이 점을 웅변한다고 할 수 있다. 가면화한 얼굴들이 그냥 얼굴들보다 더 생생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는 것은 중요한 역설이다. 그것들은 더 깊은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얼굴이나 가면이 그의 작업에서 내내 중요한 집착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4.
안창홍의 경우 흥미로운 것은 앞서 말한 치유와 해방의 느낌이 그의 작업의 장인적 개화와 맞물려 이루어지고 있는 점이다. 지금 그의 작업의 장인적 조형성이 새로운 깊이를 더하고 있는 순간인 것 같다. 최근 작업에서도 간혹 그런 느낌이 있었는데 특히 이번 전시작에서 나는 그것을 느낀다. 한 순간 저절로 이루어진 것 같은 집중과 농축, 그리고 그것은 기교적 내공과 정신적 내공이 합쳐진 결과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게 한다. 특히 이번 꼴라쥬 작업에서 칼질의 내용과 꼴라쥬의 격에서 그 점을 애기할 수 있다. 균열선들과 접합선들은 거의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운 듯 보이면서 이미지에 새로운 내용과 깊이를 부여한다. 더 미학화한 거리를 두고 이미지를 관조하게 한다할까. 주목할 것은 특히 한 숨에 이루어진 듯한 그 순발력과 대담성이다. 요컨대 호흡의 문제이고 정신의 문제인 것이다. 기교적 면에서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다. 다행히 그는 그것이 뛰어난 작가이다. 지금 그 기량이 원숙과 농축을 더해가고 있다는 것을 이번 작업에서 느낄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필휘지 같은 순발력과 집중성의 문제인데 이것이야말로 장인적 진품성에 관한 얘기이다. 이 점에서 그의 작업은 우리에게 소중한 것을 환기시킨다.
연출자이자 장인으로서의 안창홍의 진면목은 아마도 그가 젖은 것과 마른 것 사이의 왕복운동을 꾸준히 하면서 상극적인 것을 아우르는 습성과 지혜를 터득한 것과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안창홍이 ‘비린 것’을 탈출하면서 ‘촌티’를 벗어나게 된 진정한 비밀인지도 모른다. 안창홍의 작업세계에는 젖은 것과 마른 것이 공존한다. 젖은 것과 마른 것 사이의 왕복운동은 그의 작업세계에 마치 젖은 날과 마른 날의 교차 속에서 인간이 숨을 쉬고 서서히 성장하듯 그런 성장과 자기 확장의 계기로 작용해왔다고 할 수 있다. 젖은 것이 비릿함이나 저항과 비애와 동격이라면 마른 것은 햇빛이고 여유로움이고 숨쉬기이고 그리고 보다 중성적인 무엇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의해보면 그가 몸 풀기 하듯 그래픽 아티스트로서의 화려한 기량을 좀 중성적으로, 다채롭고 여유 있게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들이 있다. 그런데 이것이 중요한 순간이고 그의 작가적 생존과 자기 확장의 중요한 비결인 것 같다.

   익명의 개인에게 바치는 오마주, 우울하면서 따듯한 사랑./최태만 [3]
   퇴폐적 매력-그 쓸쓸한 시선 /박 석 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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