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홍 ' 똥







안창홍 평론모음
AHN CHANG HONG ' CRITICI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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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인한 4월 봄날은 간다 /심광현 2006/04/06
잔인한 4월, 안창홍의 그림을 보고 한 편의 잠재적 영화를 읽게 되다.  

  대륙으로부터 불어오는 스산한 황사가 돋아나는 봄기운을 휘감아 쓸어버리는 4월, 그래서

겨울의 황량함이 잔존하는 4월은 봄의 희망을 계속해서 유예시키는, ‘잔인한’ 달이다.

따스하면서도 스산하고, 희망이 싹트다가도 검은 황사로 절망을 덮어버리는, 이 복잡한 계절,

그것도 바로 4.19 항쟁 기념일에 화려하면서도 고독하고, 격렬하면서도 명상에 잠긴 듯한,

생과 죽음의 그림자가, 개인적 자유와 사회적 억압이 엉켜있는 복잡한 그림을 그려온 화가

안창홍의 전시회가 열린다. 이런 일치가 단지 우연일까?

<봄날은 간다>, <부서진 얼굴>, <49인의 명상>, <사이보그의 눈물>은 이번 전시에

출품되는 작품들의 제목이다. 이 제목들은 자연스럽게 봄과 황사와 4.19가 얽혀 있는 4월의

복잡한 이미지와 연결된다. 게다가 지금 우리 사회는 온갖 갈등으로 범벅이 되어 있고 도처에

양극화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으며 한탄과 분노와 원망이 넘쳐흐르고 있다. 위험의

그림자들이 사회 전체를 덮어씌우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계절의 이미지-역사의 아픔을

함축하고 있는 4.19의 이미지-작품의 제목 사이에서 연상되는 복잡한 연결-접속은 각별한

느낌을 준다. 황사로 훼손되는 4월, 잔인했던 역사에 항거하다 숨져간 민중의 넋을 기려야

하는 4.19의 언저리에서 울려 퍼지는 <봄날은 간다>는 노랫가락은 멜랑콜리보다 짙은

연민과 회한의 감정을, 익명의 개인사들! 속에 묻혀있는 생과 사의 기로에서 체험했던 아픔과

희망의 깊은 골을 환기시킨다.  

  화가들은 누구보다 계절의 기후에 민감하다. 도시보다 시골에 사는 화가들은 특히 4월의

기후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15년 이상 양평 단월면 삼가리에 거주해 이제는 삼가리 동네

터줏대감이 되다시피 한 안창홍은 특히 그러할 것이다. 그는 작은 샛강이 삼가리로 갈라지는

곳에 아늑히 둘러싸인 섬 같은 동네의 비스듬한 언덕에 넓게 자리한 화실 마당에 나가 낮과

밤과 계절의 흐름을 매일 읽어내고 바람의 다양한 결에 온 몸을 마주하며, 먹구름과 황사와

밝은 별빛과 따스한 햇살에 말 걸기 하는 법을 터득했을 터이다. 한 겨울이 아닌데도 눈발이

날리는 봄기운이 아련한 스산한 마당을 거닐며 뫼비우스 띠처럼 절망과 희망, 고독과 욕망이

꼬여 있는 삶의 궤적을 십 수 년 간 반복하다 보면 잔인한 윤회의 법칙을 직감할 수밖에

없는 감각의 명멸을 거듭했을 터이다. 가장 낮은 육질의 표면으로 침잠했다가 가장 높은

정신의 한계로 튀어 오를 때, 마치 롤러코스터를 탈 때 느끼는 현기증, 거대한 하늘의 별빛을

바라보다 어질어진 화실을 비집고 들어가 화폭을 맞이할 때 느끼는 심란함의 반복 등이

그러할 것이다. 안창홍의 지난 작품들에는 분명히 일상의 감각과 정신을 뒤집는 롤러코스터

타기 같은 일탈의 기쁨과 자극을 탐색하는 궤적들이 드러나 있다.


  그런데 십여 년 만에 찾은 그의 화실을 채우고 있는 이번 작품들에는 사적인 맥락을 직접

뛰어넘는 사회적인 맥락들이 자연사적인 맥락들과 마주쳐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런 중층적

맥락들은 매우 예민해진 감각으로 날카롭게 편집되어 있었다. 그동안 그를 매료시켰던 육체와

욕망과 환각의 세계를 밑에서, 옆에서, 위아래에서 요동치게 했던 숨겨진 사회적-역사적

시간의 길고 복잡한 맥락들이 서서히 표면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이런 전경과 후경의 역전은 360도라기보다는 180도에 가까워 보인다. 180도의

반전은 전경과 후경 사이에 새로운 틈을 만들어내며, 그 틈새에서 리얼리티의 자락이 삐죽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화려하게 채색된 욕망과 환각의 주체와 풍경 대신에 흑백 사진 몽타주와

은은하게 채색된 데생 위주의 초상 이미지들이 비집고 드러나는 광경으로 인해 모두가

켄트지 전지 크기로 동일한 초상 이미지들의 앞과 뒤를 연결해주는 <봄날은 간다>의 초대형

풍경들은 마치 오프닝 풍경과 엔딩 풍경 사이에 배치된 다큐멘터리 영화의 스틸 컷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때 오프닝과 엔딩의 풍경의 순서는 서로 바뀔 수 있고, <부서진 얼굴>-

<49인의 명상>-<사이보그의 눈물> 연작들로 구성된, 전형적인 3막 구조 내에서 각

시퀀스와 쇼트들의 순서는 충분히 바뀔 수 있을 것이다. 두 장의 대형 풍경을 앞뒤로 둔

사이에 배치될 57장의 초상 이미지들의 순서는 미리 결정될 수도 그렇다고 무작위로 배치될

수도 없는 관계를 이룰 것이다. 이 유동적인 순서 배치로 인해 이 전시회는 보는 사람의

관심과 입장에 따라 다양한 줄거리를 함축하는 한 편의 인터랙티브 영화처럼 보일 수 있다.

작가가 전시 연출 시 어떤 유형의 콘티로 순서를 결정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는 다만 작가가 시놉시스 상태의 스틸 컷들을 내게 보여준 상태에서 나 나름의 관찰과

경험을 토대로 특정한 줄거리를 엮어내어 한 편의 시나리오를 써볼 수밖에 없다. 또 모든

관객들도 작가가 연출한 실제 전시 배치를 보면서 자기 방식으로 한 편의 시나리오를

써나가게 될 터이다.



오프닝 시퀀스 - 봄날은 간다


  이 시나리오의 오프닝과 엔딩은 두 개의 대형 풍경화로 구성될 것이지만, 그 순서에 따라

이 시나리오의 성격은 비극이 될 수도 해피엔딩이 될 수도 있다. 어느 쪽을 택할지는 두 작품

자체를 분석해 보고 결정하기로 하자.  

  <봄날은 간다>는 95년부터 시작된 연작이다. 95년 처음 선보인 <봄날은 간다>는 숲

속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찍은 기념사진 속의 인물들을 실루엣 중심으로 단순화하여 화려한

아크릴로 채색하고 배경 숲을 화려하다 못해 형광색처럼 강렬한 연두색과 초록과 노랑으로

칠한 위에 수많은 노랑나비들이 화면에 박혀 있는 그림이다. 친구들과의 함께한 봄날 소풍의

흥겨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지만 이번에 전시될 <봄날은 간다>는 초등학교 시절 능에 소풍가서 찍은 빛바랜

기념사진을 초대형 벽화 크기로 확대해서 그 위에 잉크를 뿌려 채색한 작품이다. 사진을

그림으로 그린 게 아니라 사진 자체를 확대하여 잉크로 드로잉 한 작품은 2002년에도 여러

장 만들어졌다. 그런데 95년의 <봄날은 간다>와 2002년의 <봄날은 간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가 눈을 감거나 눈이 검게 동공화되어 있다. 죽은 자들의 또는 죽은 자들에

대한 묵상이거나 또는 죽음의 이미지를 기념사진에 겹쳐 버린 패러디화라고나 할까? 거기서

시간은 화석에 박혀 있듯이 정지해 있다. 그러나 이번 작품에서는 아이들의 눈이 모두 살아

있고, 나비들 역시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죽음에 고착된 시선이 오래된 생명의 기억에 대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 같은 변화가 느껴진다. !

  게다가 이번 작품들은 길이가 4미터 이상이 되는 초대형 작품이라 능에 기념사진을 찍은

수십 명의 아이들이 마치 마주 대하는 듯한 느낌이 들게 등신대 크기로 확대되어 있다.

비교적 선명하지만 구겨진 작은 사진이 수십 배로 확대되면서 작은 흔적들이 커다란 균열을

드러내며 마치 회화적 터치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이 사진은 잃어버렸던 시간을 재생하는 것

같은 강한 인상을 남긴다. 사진은 순간의 기록이기에 시간의 화석이라는 말이 있다. 유일무일

했던 그때 그 장소의 사람들의 특이성이 화석처럼 담겨져 있다는 말이자 살아있는 순간을

화석화했기에 시간에 죽음의 각인을 부여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사진들 역시 시간의

죽음의 지표들이다. 하지만 구부러진 흔적, 잉크로 뿌려진 노랑나비들의 팔랑거리는

몸짓들에서 화석 속에 갇힌 아이들과 나비들과 따스한 봄날의 능과 능 뒤의 숲들이 서서히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이 느껴진다. 스틸 사진 속의 이미지들이 서서히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이것이야말로 오프닝 시퀀스에 적격이 아닐까? 그렇다면 양귀비꽃이 만발한 봄의

언덕을 두터운 아크릴 화폭에 그대로 찍어서 떠온 것 같이 두텁게 그려진 대형의 <봄날은

간다 연작-양귀비 언덕>은 엔딩 시퀀스로 배치될 수밖에 없다. 아찔할 정도로 짙은 붉은

색과 노랑이 아우러진 <양귀비 언덕>은 강한 생명의 찬가를 숨이 찰 정도로 크고 깊게

쏟아내고 있다. 해피엔딩보다 더 강한 엔딩, 욕망의 해방구에 대한 찬가가 예감된다.

  이전 작품들에서는 <봄날은 간다> 연작은 과거시제에 깊이 고착되어 있었고, 등장인물들의

눈은 검게 동공화되어 있거나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전시의 두 대형 작품들은 스틸

컷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실루엣들의 현재진행형 시제와 생명의 찬가를 쏟아 내는 양귀비

언덕의 충만한 이미지들이 전경으로 부각되고 있다. 40여 년 전의 먼 과거와 현재진행형의

풍만한 풍경 사이에서 대체 무슨 일들이 벌어졌을까?



제1막 - 부서진 얼굴


  그 사이에 벌어진 일들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겪었을 한국 근대사의 수많은 장면들일 것

같다. 40여 년 전 나 역시 안창홍의 유년 시절 소풍사진과 거의 동일하다고 해도 좋을 봄

소풍을 갔었고, 그와 유사한 소풍사진들을 아직도 갖고 있다. 그렇게 동일한 유형의 장소,

단체소풍이라는 동일한 형식과 기념사진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지난 40여 년 간 겪은 개인적

체험들에는 60년대부터 시작된 40여 년 간의 한국근대화의 무거운 낙인들이 각인되어 있다.

그렇게 해서 당시는 순박하고 철없던 개구쟁이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부서진 얼굴>을 가진

성인들로 변화해 갔다. 어떤 아이는 얼굴에 블레이드 자국이 찍히고, 어떤 아이는

프랑켄슈타인처럼 누더기로 기운 얼굴을 갖게 되고, 어떤 아이들은 프레스로 눌려 얼굴이

찌그러지고, 어떤 아이들은 화상을 입은 얼굴을 갖게 되었다. 찌그러지고 짜깁기 당하고

부서진 얼굴들은, 40년 전 최빈국의 지위에서 이제는 세계 경제 10위의 대국으로 도약하게

만든 근대화의 화려한 성장과정이 낳은 사회적 부의 총체라는 측면에서는 눈부신 기적의

이면에서 개인들의 삶의 궤적에 각인된 끔찍한 사회적 성형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떤

이는 유신시절에, 어떤 이는 5공화국 시절에, 어떤 이는 IMF 위기의 시절에 자신의 얼굴과

삶을 상실하고 끔찍한 사회적 인두로 지져지는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 영화의

제1막은 오프닝시퀀스의 따스한 분위기를 역전시킨다.

  그렇게 해서 모처럼 과거의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솟아오르기 시작한 생명의 감각이 재

영토화되고 포획된다. 사진의 프레임은 실존의 흔적을 동일한 규격으로 재단하고 포획하는

장치이다. 그래서 사진을 “찍다”의 영어 표현은 총을 쏘다 와 같은 “shooting"이다. 수많은

실존적 얼굴들은 동일한 프레임으로 “사격되어" 박제된 호랑이나 늑대처럼 벽에 걸린다.

<부서진 얼굴> 연작은 전형적인 사진 꼴라쥬다. 같은 얼굴을 찍은 여러 장의 사진들을

상이한 형태로 오려내어 겹쳐서 붙이기 방식으로 탄생한 이질적인 사진들이다. 여기서 인물의

정체성은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 상이한 윤곽들이 겹쳐지면서 한 얼굴의 동일성은 부서지고

해체된다.



제2막 - 사이보그의 눈물


  부서지고 해체되고 짜깁기된 얼굴들은 이제 사이보그로 대체된다. 70-80년대의 고도성장

기간을 경유하는 과정에서 대다수의 노동자들은 재충전의 시간과 자원이 결여된 상태에서

총동원된 결과 부서지고 해체되고 쓸모 없게 되었다. 90년대 동구권의 몰락과 더불어

정보화와 세계화의 시대가 열리면서 인간 노동력은 서서히 정보화된 자동기계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생산수단의 자동화는 노동력의 감소를 동반하며 급기야 IMF 위기관리 시대로

접어들면서 외부로부터 강요된 구조조정 과정에서 “노동의 유연화”가 전민중의 삶을

변화시켰다. 부서진 얼굴들은 무대에서 사라졌고, 첨단 정보기술로 무장된 자동화 기계에

접속된 “유연화 된 노동자”들이 새로운 주인공으로 무대에 등장했다. 하루 12시간이 넘는

고강도 노동과정에서 부서져 나갔던 과거의 노동자들과는 달리 이제 “기계화 된”(정보기술에

의해 유연하게 조작가능하며, 언제든지 해고될 수 있도록 유연화 된) 노동자들의 얼굴은

모두가 동일한 크기와 색깔을 가진 “칼라 렌즈” 때문에 동일한 구조의 시선을 갖고 관객들을

쳐다보고 있다. 성과 세대와 형태의 차이가 있기는 한데 똑같은 눈을 갖고 있기에 이들의

얼굴은 모두가 차이가 있으면서도 비슷해 보인다.    

  <사이보그의 눈물>은 같은 크기의 켄트지에 연필로 데생한 후에 은은하게 파스텔 톤의

색을 물들게 만든 작품이다. 남녀노소 모두가 눈을 크게 보이게 하기 위해 착용하는 빗살무늬

“칼라 렌즈”를 끼고 있어 모두가 생뚱맞게 보인다. 억지로 눈을 벌려놓은 듯하여 모두가

불안하게 허공을 쳐다보는 듯한 시선을 갖고 있고, 얼굴에는 간간이 전기 배선이 삐져나와

있다. 눈을 칼라 렌즈로 이식 당하고 나면 강제로 눈물이 나게 마련이다. 때문에 이 눈물이

감정의 북 바침에서 오는 눈물인지 아닌지를 판별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들 강제로 유연화 된

사이보그들이 흘리는 눈물은 감정이 북받쳐서 흘러내리는 눈물보다 더 싸하게 가슴 깊은

곳으로 스며든다. 마치 황사와 함께 불어오는 북서풍이 뼈에 시리듯이 말이다.



제3막 - 49인의 명상


  <49인의 명상>은 <부서진 얼굴>의 주인공들이 눈을 감고 있는 꼴라쥬 사진이다. 그래서

그런지 관 속에 누워 있는 시신의 얼굴을 위에서 촬영한 것처럼 보이는 사진이다. 그런데

이들 눈 감은 시신들의 초상은 눈을 뜰 때는 부서지고 불안에 떨고 일그러진 얼굴들이었던

것과는 달리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 눈을 감았을 때야 비로소 편안해진 것 같은 모습니다.

“고강도 노동”에 의해 부셔지고 해체되고, “유연화 된 노동”에 의해서 사이보그화 되었던

이들이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다. 이들은 무엇에 대해 명상하고 있는가? 어렸을 적 따스한

봄날 단체로 소풍 가서 놀던 친구들과 선생님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던 오프닝 시퀀스의

기억도 이들의 명상 속에서 떠오르는 장면들일 것이다. 당시로는 정말 상상하지도 못했겠지만

인생의 봄날은 바로 그 때였던 것이다.
  


엔딩 시퀀스 - 양귀비 언덕 위로 봄날은 간다.

  4월 19일에 열리는 전시에 출품된 <49인의 명상>은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4.19

항쟁의 주인공 또는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의 의미를 환기시킨다. 이들은 모두 눈을 감고 있다.

이들이 명상 중이다. 그러나 이들의 명상이 단순히 실제의 역사적 4.19 자체에 대한 명상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은 이 잠재적 영화의 내용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정치적 역사적 사건들과는 다른 시간대에서 다른 각도에서 이들의 명상 장면을

살펴보자.

  눈을 감아 표정이 확연히 달라져 있다. 왜 그럴까? 들뢰즈에 따르면 본래 의미생성이란

기호들과 잉여들을 기입할 흰 벽-그리고 검은 구멍(눈과 입과 코와 귀)이 없으면 안 된다.

그래서 눈을 감으면 기호들과 잉여들이 기입될 여지가 사라진다. 그래서 눈을 감은 얼굴은

의미생성과 기호 이전의 세계로 후퇴한다. 우리는 아직 그것이 어떤 세계인지 모른다. 하지만

눈을 감은 얼굴은 다음과 같은 지평의 출현을 촉발시킬 수 있다.  

“주체화는 의식, 정념, 잉여들을 숙박시킬 검은 구멍이 없으면 안 된다...얼굴, 즉 흰 벽-

검은 구멍이라는 체계는 흥미롭다...본래 얼굴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얼굴은 빈도나 확률의

지대들을 규정하고, 미리 적합하지 않은 표현들과 연결접속들을 적합한 기표작용으로 중화하는

장을 결정한다...구체적인 얼굴들은 얼굴성이라는 추상적인 기계로부터 태어난다.”1)

  들뢰즈에 의하면 이 기계는 기표에 흰 벽을 주고, 주체화에 검은 구멍을 주는 것과 동시에

얼굴들을 생산한다. 검은 구멍-흰 벽의 체계는 따라서 이미 얼굴이 아니라 톱니바퀴의 변형

가능한 조합들에 따라 얼굴들을 생산하는 추상적인 기계이다. 추상적인 기계가 그것이

생산하는 것, 그것이 생산할 것과 닮았으리라고 기대하지 말자. 추상적인 기계는 잠과 황혼

녘과 환각과 즐거운 육체적 경험 등의 우회로를 통해서, 우리가 그것을 기다리지 않을 때

출몰한다. 들뢰즈에 의존하지 않고 생각해도 얼굴은 실제로 표면일 뿐이다. 특징들, 선들,

주름들, 길거나 각지거나 세모난 얼굴. 입체 위에 붙여져 있고 감겨 있더라도, 그리고 단지

구멍으로서 존재하는 동공들을 둘러싸고 이것들과 인접해 있더라도 얼굴은 하나의 지도에

다름 아니다.2) 모든 지도는 어떤 흐름의 통로, 연결, 접속을 위한 것이다. 이 때문에 얼굴에도

어떤 흐름들의 연결과 접속과 차단과 고착의 역사가 기입되게 마련이다. 검은 구멍들에는

바로 그 역사가 간접적으로 각인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종종 속게 되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차단과 고착의 역사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바로 의미화, 기호화

이전의 얼굴 성, 얼굴성의 추상적 기계 그 자체이다.

  얼굴은 처음부터 그렇다. 그것은 본래부터 생명 없는 백색 표면들, 빛나는 검은 구멍들,

공허와 권태를 지닌 거대한 판이다. 벙커-얼굴. 인간이 하나의 운명을 지닌다는 점에서라면,

그것은 차라리 얼굴에서 벗어나는 것, 얼굴과 얼굴화를 망치는 것, 지각 불가능하게 되는 것,

잠행자가 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물성으로의 회귀나 머리로의 회귀에 의해서가

아니라 매우 정신적이고 특별한 동물-되기에 의해서, 벽을 뛰어넘고 검은 구멍들로부터

벗어나는, 진정 이상한 되기(=생성)에 의해서이다.3) 눈을 감은 49인의 얼굴들이 명상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얼굴 성 자체에 내재된 생성의 가능성 그 자체가 아닐까? 이런

생성의 가능성으로부터 4.19라는 역사적 희생과 고통과 저항의 역사의 연대기적 기록이

아니라 그 시간대에 민중의 삶 속에 내재했던, 그러나 이후 5.16과 압축적-왜곡된 근대화

과정에 의해 차단되고 포획되었던 잠재적 생성의 시간대들이 이끌려 나올 수 있다. 바로 이런

지점에서 <49인의 명상>은 이 잠재적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이들의 명상 위에, 이들의 명상 아래에서 서서히 진하디 진하게 숨 막히게 화려한 붉게

물든 양귀비 언덕의 풍경이 넓고 깊고 힘차게 펼쳐진다. 이들의 부서지고 해체되고 조작된

삶의 역사를 위로하듯이 말이다. 이 잠재적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게 해서 억압을

생성으로, 착취를 해방으로, 고통을 즐거움으로 변화시킨다. 이보다 더 훌륭한 4.19 기념일의

묵상이 있을까?

  안창홍이 이런 식의 시나리오를 실제로 염두에 두고 이 작품들을 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번 작품들은 너무나 명확하게 이런 방식의 해석을 유도하고 있다. 이 작품들의

명확한 전경 밑에는 수많은 후경의 가능성들이 잠재해 있다. 다른 시나리오들도 무수히

가능하지만 지난 20년의 민주화의 결실이 사회적 양극화로 귀착되고 있는 오늘, IMF

구조조정에 의한 사회적 양극화도 모자라 이제는 한미FTA라는 초강도 쓰나미급 구조조정에

의해 한반도의 미래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오늘, 우리 역사에서 가장 잔인한 시련을 맞고

있는 오늘의 상황은 나를 명백히 이런 해석으로 끌어가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이런 해석이

안창홍의 삶과 작품의 지난 궤적과 맞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안창홍의 삶과 작품의 흐름 속에 꿈틀거리고 있는 해방과 흥취에 대한 열망, 그렇지만 냉혹한

현실과의 대면 속에서 이를 미화하려 하지 않았던 안창홍 나름의 치열한 삶과 작품을

파고든다면, 이런 해석도 결코 무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나는 이런 식의 시나리오가

확연히 중년을 넘어서고 있는 안창홍의 삶과 작품이 더 넓고 강렬한 생성의 지평으로

확장되는 데 일부 기여하기를 희망한다.
   얼굴, 시선의 장소들 /박영택 [3]
   안창홍의 세계- 도착과 죽음을 통해 재해석되는 현실 / 미술과 담론 2001여름호/김 원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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