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홍 ' 똥







안창홍 평론모음
AHN CHANG HONG ' CRITICI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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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몸의 진실에 대해 말하기를 두려워하랴/최태만 2011/01/04




최태만/미술평론가•국민대 교수

이 사람을 보라

이 사람을 보라. 윗옷을 벗은 채 상체의 맨살을 드러낸 그는 위장무늬 군복바지를 입고 있다. 젤을 발라 잘 빗어 넘긴 가지런한 머리카락과 시원한 이마 아래 부릅뜬 눈을 가진 이 남자의 형형한 눈빛과 당당한 체구를 자랑하듯 벗은 상체에 새겨 넣은 문신은 그를 예사롭지 않은 사람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림을 보고 있는 우리를 향해 노려보고 있는 공격적인 눈빛에도 불구하고 상체를 휘감고 있는 문신을 포함하여 잘 손질했지만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기른 머리카락과 다소 부조화스런 붉은색 스니커즈로 볼 때 그는 분명 군인은 아니다. 그의 뒤에 배경처럼 놓인 캔버스와 바닥에 덕지덕지 말라있는 물감자국에서 그가 서 있는 장소가 작가의 작업실임도 알 수 있다.
그의 발치에 죽어 널브러진 쥐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바닥에 나뒹구는 이 죽은 쥐는 은유인가, 상징인가.

흥미로운 점은 안창홍의 최근 작업에서 은유나 상징은 화면 뒤로 사라지고 있는 대신 직접적이고 즉물적인 대상의 재현이 전면으로 돌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죽은 쥐는 정치적 함의를 지닌 것임에 분명하며 여기에서 그의 인물화가 단순한 재현에 머물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이 작품의 형식적 특징을 주목할 때 이 남자가 취하고 있는 포즈에서든 그를 둘러싸고 있는 배경에서든 이 작품이 연극성과 즉물성이란 두 대척지점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음을 간파하기란 어렵지 않다. 먼저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을 옮겨놓은 듯한 상황의 연출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연극적이다.

주인공 남자의 공격적인 태도와 아울러 화면의 구조나 내용과 상관없이 불쑥 등장하고 있는 쥐의 사체는 이 연극성을 고양시키는 소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연극성 못지않게 대상을 냉정하게 관찰하고 재현한 시선과 방법은 이 작품을 즉물적인 것으로 만들어놓고 있다. 연극성과 즉물성이란 두 상반된 세계의 불편한 공존은 또한 작품의 특이한 아우라를 강화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화면 속의 주인공은 당당하지만 동시에 사건의 전후 동작을 예측하기 힘든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 바닥에 널브러진 쥐를 때려잡은 몽둥이를 뒤로 숨기고 있거나 아니면 자신의 승리를 확인한 다음 그것을 기념하는 위풍당당함을 과시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다른 작품에서 그는 벌거벗은 나신으로 다시 등장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그는 단독상으로서가 아니라 역시 벌거벗은 여성과 나란히 나타나고 있다. 다리를 한껏 벌린, 그래서 도발적이고 도전적으로 자신의 육체를 드러낸 남자에 비해 여자는 상대적으로 다소곳하게, 그래서 전통적인 누드화의 규범으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거벗은 두 육체는 에로티시즘과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거기에는 단지 벗은 육체만 존재할 뿐 어떤 성적 호기심도 개입할 여지가 없다.

실제의 살갗에 필적하도록 칠해진 피부의 색채와 신체의 볼륨이 드러나도록 표현된 명암조차 누드화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심리 속으로 잦아드는 관음증을 자극하기보다 저기 벗은 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지시하기 위한 기능만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듯이 보일 지경이다. 그들의 무표정 속에 감추어진 도발적 진지함이 성적 호기심을 억제시킨다기보다 벗은 육체를 너무도 단호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대상이 전면으로 돌출하는 반면 그 대상이 불러일으키는 성적 감흥은 멀리 후퇴하고 있는 것이다.

재료에 있어서도 아크릴릭의 사용은 대상과의 거리를 유지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델과 정서적인 유대는 유지하되 대상 그 자체를 객관적으로 표현하는데 이만큼 적절한 매재(媒材)도 없을 것이다.


벗은 몸의 전략, 응시

이렇듯 미학적 위장이나 심미화를 거부하고 있는 안창홍의 인물화는 1920년대 독일에서 나타난 신즉물주의(Neue Sachlichkeit) 경향의 작가 중에서 대상을 냉정하게 묘사한 크리스찬 샤드(Christian Schad)의 회화를 떠올리게 만든다.

차갑고 냉혹하게 대상을 재현한다는 점과 아울러 특정인물의 초상을 통해 그 시대와 사회, 정치적 현실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상통하지만 안창홍은 그것으로부터 더 나아가 ‘보여주는 육체’를 통해 미술사가 벌거벗은 몸에 걸어놓은 온갖 주술이나 최면조차 해체해 버린다. 말하자면 그는 전통적인 누드화의 규범을 위반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이 작품을 바라보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대상으로서의 육체를 전면적으로 노출하기 위해 그는 채색뿐만 아니라 무채색의 모노톤으로 대상을 그리기도 한다.


다시 그 남자에게로 돌아가 보자. 그의 몸을 휘감고 있는 저 문신의 정체는 무엇일까. 작가에 따르면 온 몸에 문신을 한 이 남자는 한때 미술을 전공하려고 했고, 회화적 재능을 발전시킬 기회를 갖지 못하자 대안으로 다른 사람의 몸에 문신을 새겨주는 것을 직업으로 선택했다고 한다. 다른 사람의 몸에 문신을 그려주기 위해 자신의 몸부터 먼저 문신을 한 이 남자는 평범한 이웃이자 한 가정의 가장이다.

일반적으로 문신을 한 사람에 대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선입견은 사회가 정해놓은 규범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회와 불화를 겪는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문신으로 장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작가가 그를 만났을 때 예상과는 달리 그는 내성적인 성격의 평범한 보통 사람이었다고 한다.

‘안개처럼 다가오는 사회적 불만을 몸을 통해 표현’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몸에 문신을 새겼을 뿐 그는 자신의 육체를 무기로 내세워 상대방을 심리적으로 위축시키거나 제압하려는 의도와 거리가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옷을 벗는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 예컨대 수치심이나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벗은 몸을 노출시키고 싶지 않은 자기보호기제의 작동으로 그 역시 작가가 그의 벗은 몸을 그리고 싶다고 했을 때 반대했었다. 그러나 작가의 오랜 설득의 과정을 거치며 작가의 뜻을 이해하면서 선뜻, 그것도 온 가족이 그의 작업실에서 누드모델로 화폭 앞에 섰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말하자면 모델과 작가 사이의 정서적 연대감이 이 작품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부부가 나란히 벗은 몸을 드러내고 있는 이 작품이 그의 인물화에서 차지하는 의미나 중요성은 크다. 더욱이 이즈음 그가 제작한 대부분의 인물화들이 한 개인을 그린 것인데 비해 유독 이 작품만 두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그런 점은 이 작품이 특정한 상황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누드화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게 만든다.

이를테면 우리는 이 작품을 보며 이들 부부가 더 나이가 들기 전에 자신들의 젊은 모습을 기록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작가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지 않을까 하는 추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기념할만한 어떤 상황도 연출하지 않은 채 이들이 느닷없이 작업실에서 벌거벗은 채 출현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추론을 여지없이 부정하고 있다.

만약 배경을 지워버렸다면 그들의 나신이 전면으로 부각되기 때문에 우리의 시선은 그들의 벗은 몸으로 집중하겠지만 다소 어수선하고 건조해 보이는 작업실 풍경이 그 시선을 분산시키고 있다. 그러나 배경은 한편으로 그림의 즉물성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같은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쥐의 사체가 널브러진 바닥과 군복바지를 입은 채 등장하고 있는 초상과 비교할 때 이 작품에서 작가는 더욱 냉정한 관찰자이자 기록자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감정적 개입을 최소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어떤 스토리텔링, 더 나아가 메시지를 내재하고 있다.

비록 벗은 몸에 대한 열광적 찬미도, 탐미적 관찰도 배제되어 있으나 이 작품을 관류하고 있는 것은 정신과 육체를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가 곧 정신임을 주장하고 있는 작가의 관점이다. 저 남자의 몸을 휘감고 있는 문신조차 이미 피부의 일부가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이 작품은 작가의 말대로 아름다운 육체가 아닌 육체 그 자체의 건강성, 그 정직함에 대해 발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실마리는 이웃에 살고 있는 한 평범한 농부 노인을 벌거벗은 모델로 화폭 앞에 세운 작품에서 이미 나타났다. 그렇다면 안창홍이 이 벌거벗은 육체들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은 단지 사물로서의 육체를 노출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적나라한 노출 속에 어떤 메타포가 내포돼 있음을 다른 누드를 통해 확인해 보자.

작가의 작업노트에 따르면 2007년 가을 사진콜라주 연작인 ‘봄날은 간다’를 발표한 이후 그는 신작에서 키치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화려한 색채의 세태 풍자적 인물화를 그리고자 했다고 한다. 즉 ‘세련된 소파에 기대앉거나 드러누워 나른하고 도발적인 포즈로 넘쳐나는 퇴폐의 시간을 희롱하는 인물들을 통해 권력과 성(性)과 부(富)의 은밀한 삼각관계를 그림으로 옮겨볼 생각이었으나 그 내용을 완전히 바꿔 흑백 단색만의 전혀 다른 성격의 인물화를 그리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의 예전 작품에 꼬리뼈처럼 남아있던 센티멘탈리즘, 문학적 설득 또는 호소, 저돌적인 공격성은 희미해진 대신 벌거벗은 육체만이 전면적으로 노출된 작품이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밝고 화사한 실내와 화려한 소품들 대신에 물감과 붓이 나뒹굴고 있고 물감자국이 얼룩진 작업실 바닥 위에 느닷없이 출몰하고 있는 누드가 불러일으키는 불편함은 작가의 전략적 고려에 의한 결과임을 알 수 있다.

벗은 몸에 대한 그의 전략이 일차적으로 선택한 것은 모델의 몸을 불편하게 만드는 소품인 베드카우치이다. 침실의 침대 앞에 놓여 있어야 할 베드카우치를 작업실 한 가운데 갖다놓은 상황연출도 낯설지만 그 위에 불편하게 몸을 뉘고 있는 누드모델의 편안하지 않는 자세 또한 어색하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은 모두 모두 관객들을 향하고 있다. 여기에서 누가 주체로서 바라보는지가 애매해진다.

서구 누드화의 관습을 추적한 존 버거(John Berger)는 그림 속의 여성누드들이 ‘이상적인 관객’이자 소유자로 간주되는 남성들의 시선에 맞춰 남성들에게 아첨하는 대상으로 그려졌다고 해석한 바 있다. 그러나 안창홍의 작품 속에서 누드모델은 자신들의 신체를 관찰하는 관객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시선에 의해 벗은 몸을 훔쳐보려는 관객의 욕망이 벌거벗겨지는 그 순간의 긴장된 당혹, 즉 관객이 그림 속의 누드모델에 의해 응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그의 벗은 몸에 대한 전략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관객들에게 자신의 몸이 보여지기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관객과 시선을 마주하는 주체로서의 당당함을 보여주기 위해 모델로 하여금 불편한 자세로 몸을 베드카우치에 걸치거나 끼워 맞추도록 요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베드카우치는 우리의 삶을 불편하게 만드는 정치, 제도, 관습, 규범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비록 이것이 우리의 몸을 옥죄는 속박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을 드러낼 수 있을 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함의를 담고 있는 그의 작품은 따라서 벌거벗은 육체를 통해 몸의 해방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그의 작품에 내재한 정치적 의미가 드러난다.



다시,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 이 사람을 보라. 이것은 니체가 쓴 자서전의 제목이기도 하다. 원전을 밝히자면 물론 성경으로까지 소급된다. 즉 빌라도의 심문장 앞에 끌려온 예수를 향해 유대인들이 그의 처벌을 요구하자 빌라도가 그들을 향해 던진 일성의 하나가 ‘이 사람을 보라’였다. 니체는 자서전 『이 사람을 보라』의 마지막 장 「왜 나는 하나의 운명인가」에서 “나는 나의 운명을 안다. …나는 신성한 성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차라리 광대가 되고 싶다.”라고 외쳤다.

기독교를 비롯하여 그때까지 유럽을 지배했던 철학과 정치사상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그는 자신에 대해 “…‘모든 가치의 전환’, 이것이 인류에 있어서의 최고의 자기성찰의 행동을 위한 정식으로서, 이것이 나의 살이 되고 나의 천재성이 된다. 내가 최초로 올바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수 천 년 동안 내려온 허위에 대한 하나의 대립자임을 각성하고 이에 맞서는 것이 바로 나의 운명이다. 나는 그 허위를 탐지해서 허위를 허위로서 경험한 최초의 인간이 됨으로써 진리를 발견한 최초의 인물이다.”라고 주장했다.

니체의 이 글을 읽으면서 안창홍이란 독특한 캐릭터를 지닌 예술가가 겹쳐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동안 안창홍이 발표한 작품을 보면 나르시시즘과 자학 사이를 주기적으로 왔다 갔다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때로는 이미지의 탐욕자로, 때로는 그것의 파괴자로서의 도발을 서슴지 않은 그의 작품은 세상의 위선을 향해 비수를 휘두르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작업일지에서 어느 날 문득 전시제목으로 ‘불편한 진실’을 떠올렸다고 기록한 바 있다. 이 불편한 진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진실을 가리고 있는 사람이 느끼는 불안을 말하는 것인가, 진실하지 않은 세상에 대한 비유인가.

이즈음 그의 작업은 노골적인 노출을 통해 육체에 대한 허위의식과 대립하고 있다. 그 중에서 ‘개성 있고 자부심 강한 ‘타투’ 예찬론자이며 관습에 얽매이기 싫어하는 자유주의자’인 H양을 모델로 그린 <베드카우치-눈을 감고 걸터앉다>의 특정부위를 확대하면 쿠르베(Gustave Courbet)의 <세계의 근원>을 떠올리게 만든다. 리얼리스트로서 쿠르베는 여성의 성기를 재현한 작품을 남겼다. 그것에는 여성의 신체기관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생명을 출산하는 여성의 몸에 바치는 경의, 즉 모성숭배와 자궁회귀의 욕망까지 깃들어 있다. 또한 그 작품에 한 남성의 관음증도 작동하고 있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안창홍의 작품에서 모델이 신체를 완전히 노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능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의 신체를 모두 보여주려는 듯 다리마저 벌리고 있는데 말이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이토록 당당하게 만들고 있는가. 성기를 노출하고 있다고 해서 포르노그라피를 떠올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크리스찬 샤드는 이미 오래 전에 자신들의 성기를 문지르며 자위를 하고 있는 두 소녀를 그린 바 있다. 신체기관의 노출을 완강하게 거부하거나 금지하는 교양 있고 점잖은 사람이나 사회제도를 향해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불편한 진실을 진실로 만드는 행위일 것이다. 그녀는 몸에 부과해놓은 온갖 금기를 위반하고 있으나 자신의 몸에 대해서는 진정한 주인이자 주체임을 주장하고 있다.

안창홍은 작품을 통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와 모델은 우리 사회가 몸에 걸어놓은 금기를 위반하는 공범이기도 하다. 이를 니체의 어법을 빌어 말하자면 안창홍이야말로 허위에 대한 대립자로서 그것과 맞서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니체는 ‘전통적인 은유의 전략적 반복을 통해 전통적 은유의 가치들을 재평가하고 전복’시키고자 했으며, 그의 이러한 은유적 기호체계를 회화에 적용한 화가는 키리코(Giorgio de Chirico)였다. 나는 이 글에서 안창홍을 니체에 끼워 맞출 의도는 전혀 없다. 더욱이 안창홍의 작품에서 키리코의 형이상학적 세계와 만날 수 있는 지점도 없다. 그러나 안창홍은 그 나름의 메타포를 가지고 있다. 가공되지 않은 몸은 진실을 은유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 벗은 육체는 건강한 주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가려져야 할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드러내야 할 것이다.

은폐로부터 비은폐, 그것을 위해 그는 벗은 육체의 객관적 실체에 주목하고 문신조차 신체의 연장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문신은 육신에 가한 자해의 흔적이 아니라 주체를 주장하는 앰블램이자 기호인 것이다. 그런데 그의 최근 작품에서도 과거 작품에서 두드러진 창백한 죽음의 그림자가 잔존하고 있다. 흑백 모노톤으로 그린 누드가 이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작가 자신은 회색이 이성적일 뿐만 아니라 현대적 감각에 어울린다고 말하고 있으나 내가 보기에 이 작품들은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몸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다. 여기에서 그 특유의 센티멘털리티가 작품의 표면 위에 여전히 남아있음을 읽을 수 있다. 게다가 누드 위에 정밀하게 그려놓은 파리는 살아있는 젊은 육신 위를 배회하고 있는 덧없음, 부패와 소멸, 죽음을 떠올리게 만든다.

과거 작품에 나타났던 나비가 영혼의 하늘거림을 상징했다면 파리는 삶의 유한성에 대한 은유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더 발전하여 해부학교실에서 사용하는 인간의 뼈와 역시 의학용 인형을 결합해 놓은 작품은 전형적인 ‘메멘토모리(memento-mori)’에 대해 떠올리게 만든다. 삶은 유한한 것, 아름다운 육체도 언젠가는 썩어 문드러지리니, 그것을 기억하라. 그의 작품에서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한 몸을 이루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다소 교훈적인 특징까지 풍기고 있다.

그가 기르고 있는 강아지가 화면 속에 갑자기 출몰하고 있는 장면 역시 다른 작품에서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을 이완시키고 작품을 정서적으로 만들고 있다. 강아지는 화면의 긴장을 해소하는 짓궂지만 귀여운 침탈 자로서 자기 역할을 수행하는가 하면 모델의 품에 안겨 있다. 그렇다면 강아지는 벌거벗은 육체의 즉물성을 하나의 물건으로 드러내지 않고 그 속에 내재한 순결성을 상징하는 장치로 동원된 것일까.

강아지를 ‘순결한 자연’으로 보는 것은 논리의 비약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징의 도입이 그의 작품에 관류하는 몸의 전략을 약화시키지는 않는다. 그의 작품이 몸의 존엄성에 대해 강변하고 있지는 않지만 평범한 사람의 벗을 통해 몸이야말로 주체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정치적 현실과 맞서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전위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 속의 이 사람을 보라. 그 속에 안창홍이란 한 개성적인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불편한 진실 /김미진
   안창홍-똥의 분변학 /윤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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