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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쁜 남자의 순정/ 강수정 2009/08/11
어머니는 항상 여자는 남자를 잘 만나야 한다고 했다. 좋은 남자란 일류 대학을 나오고 사회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돈을 잘 벌어야 하는데, 가정적이면 더 좋다고 하셨다.

좋은 남자를 만나는 것은 참 힘든 일이고, 그러다보니 안전장치로 학벌, 가정환경 등, 사회 속에서 객관화된 지표에 의존하게 된다. 비단 부르디외(Pierre Broudie)의 '구별짓기' 개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를 충분히 용인하고,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사회적으로 주입된 믿음을 근거로 하자면, 안창홍은 애초에 교재를 허락받지 못할 나쁜 남자였다.

그는 이 사회가 원하는 자격요건에서 일찌감치 떨어져 살아 왔고, 아예 수용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비참함과 화려함이 함께 떠도는 그의 화면에서 잘났지만, 소외된 자의 쓸쓸한 고독과 자신감으로 포장된 시니컬한 카리스마를 발견한다. 그리고 우리는 순진한 어린 처녀처럼 불쾌해 하면서도, 툭 뱉는 욕지거리에 매료되고, 그 비극적 풍모에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을 느낀다. 그것은 어머니를 배반하는 짜릿한 스릴이고, 그 때문에 더욱 짙어지는 애틋함과도 같은 것이다.
  

그의 작품을 시대별로 회고할 수 있었던 < 안창홍:시대의 초상>과 흑백 누드화의 <흑백거울:마치 유령이나 허깨비들처럼>전은 우리 사회를 신랄하게 바라보며 거침없이 뱉어내는 ‘나쁜 남자’의 고독과 시니컬한 카리스마를 유감없이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는 흔히  1980년대 참여했던 <현실과 발언>의 활동으로 인해 소위 ‘민중미술’ 작가로 구분되기도 했다. 당시 이 그룹은 한국의 정치, 사회적 상황을 비판하며 ‘재현을 통한 현실의 반영’이라는 미술의 시대적 사명감을 안고 활동하였고, 한국 근현대사와 같은 거대담론을 주로 서사 구조의 재현 방식을 통해 표현하였다. 그러나 안창홍은 오히려 그 시대와 상황을 철저하게 개인주의적 화법을 선택하여 담아내었다.

그는 억눌린 개인의 심리를 강간, 마약, 가면 놀이 같은 자극적인 소재와 플라스틱 같은 천박한 색감으로 천연덕스럽게 발표했다. 이는 당시 개발 독재에 짓눌린 사람들의 탈출구 없는 황폐한 일상과 불안을 병적인 잔혹함을 통해 나타낸 것이며, 사회적 공포와 개인의 비극을 화면에 극단적으로 배설한 것이기도 했다.

특히 《가족사진 시리즈》등은 직접적인 현실 비판에 몰두하고 있었던 당시 진영에서는 분명히 ‘강철대오’를 엇박자 내는 내밀하고 개인적인 독백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작품에서 현대 문화의 하나의 징후로서 눈을 파내버린 가족사진을 통해 극단적인 인간관계와 병든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의 비극적인 인간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냄으로서 시대를 넘어서는 보편성을 획득하였다.

유령처럼 추억의 장 속에 부유하고 있는 이들의 관계는 이미 박제된 기억 속에서 더 이상 가족의 기념사진이 아니라, 한 개인의 영혼에 드리운 상처에 대한 암시이거나, 척박한 시간을 고증하는 한 시대의 우울한 초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는 현대사회의 가족의 해체와 그로 인해 비롯된 사회의 근원적인 불안과 정신의 피폐함을 일찌감치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퇴폐적인 에로티시즘과 죽음의 음울한 합주를 화면 속에 연주하며 현대 도시의 폭력성과 소외된 개인의 비극을 표현하였다. 《헤어스타일 콜렉션》은 미장원에 있는 헤어스타일 광고를 착안하여 그린 작품이다. 그림 속의 똑같은 얼굴의 여성들은 단지 머리모양의 변형에 의해서만 정체성이 바뀌고 있으며, 해골로 인해 미소는 병적이고 음산한 것으로 변질되었다. 이 여인의 입가의 퍼진 립스틱 자국과 절단된 목은 얼마 전 사이코 패스의 제물이 되었던 소외된 여성들을 떠올리게 한다.

안창홍은 이 작품을 통해 현대 도시의 메마른 익명성과 우리 사회의 폭력과 단절된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개인의 피폐함과 비극적 결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훼손된 신체들 -특히 얼굴-은 항상 우리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이 시선의 문제는 안창홍의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김-치》에서도 흐릿하게 확대된 조선광복군의 사진 안에는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엄숙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이 작품은 교과서에 실린 조선광복군의 기념사진을 차용하여,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 역사를 말하고자 한 것이다.

역사 앞에 젊음과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이 비장한 청년들의 얼굴에 안창홍은 가벼운 붓질과 경박한 색으로 낙서를 했다. 그리고 경쾌한 날개 짓의 하얀 나비들을 여기저기 날아 올렸다. 그는 “김-치”하며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는 그들을 흰 이를 드러내며 억지로 웃게 만들었지만, 현실의 역사 속에서 이들은 결국 몇몇 권력자들에게 희생된 개인이며. 봄날의 나비처럼 덧없이 시간 속으로 사라진 존재들 일 뿐이다.

우리의 근현대사가 개인들의 희생을 딛고 권력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되고 조종되었다는 그 우울함을, 그는 오히려 우스개 소리처럼 깐죽대는 반어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도 이 역사는 사회의 어느 구석에서 반복되고 있다. 사진 속의 시선들은 말을 건다.  ‘현재 당신의 시간은 당신이 온전한 주인인가?’ 하고. 이처럼 직접적인 시선들이 주로《사이보그》등의 작품에서 자주 나타나지만, 《49인의 명상》이나 《자연사 박물관 연작》에서는 내재적인 시선으로 우리의 머리 속을 꿰뚫기도 한다.

《자연사 박물관 연작》은 자연을 통해 인간성의 비극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그러나 안창홍의 자연은 한때 현실비판 작가들이 자연이 주는 안식과 평화로움에 관심을 가졌던 것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그는 작업실 뜰이나 수풀 속에서 찾아낸 곤충, 식물, 새, 오브제 등 버려진 주검들의 잔해를 그렸던 것이다. 이 처럼 자연조차도 그의 스펙트럼 안에서는 시니컬한 카리스마 속에서 생명의 빛을 소진하게 되는 것이다.

삶의 어두움과 미이라처럼 각인된 주변의 물질들의 주검을 검은 아크릴릭 물감과 대리석가루를 섞어서, 규격이 똑 같은  캔버스에 하나씩 그리면서 그는 화면에 저절로 찍혀진 프린트(화석)같은 손의 느낌을 억제하면서, 박물관의 수집물처럼 그들을 새로운 시간 속의 무덤에 가두어 두었다.

살아있는 생물을 장난삼아 천천히 죽이는 아이들의 천진한 잔인함을 무채색 화면으로 위장했다고 치더라도, 화면 속의 미키마우스의 두개골이나 말라비틀어진 지렁이는 그가 꾸준히 추구해온 인간성의 비극에 대한 화두를 숨기지 못하고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숨겨진 잔혹함과 함께 어울어진 빛바랜 자연과의 조우는 분명 그의 또 다른 매력이다.

이 매력이 최근 다시 한번 우리 앞에 재현되고 있다. 건강문제로 사선(死線)을 넘어 본 그는 이번에 《베드 카우치》연작을 선 보였다. 여기서 그의 천박할 정도로 화려한 색감과 현실을 할퀴는 시니컬함을 찿아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여전히 금기시하는 것들을 천연덕스럽게 표현해내는 안창홍다운 면이 커다란 화면에 흑백의 색감으로 우아하게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사이보그》연작에서 선 보였던 응시의 불편함과 연필의 흑연이 주는 편안함이 만들어내는 미묘한 부조화가 이 시리즈에서 한 단계 더 진보된 것이다. 전시장을 압도하는 대형 흑백 누드화의 인물들은 베드 카우치에 누워 우리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안창홍이 일상에서 접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특히 《베드 카우치 5》는 이웃 농사꾼이다. 그는 생전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 상상도 못했겠지만, 작가의 간곡한 부탁을 듣고 스스럼없이 옷을 벗었다고 한다.

전문 모델이 아닌 어색한 모습은 사실 그동안 누드화가 보여주는 미묘한 관능미와는 애당초 거리를 둔 것이다. 젊은 여성들도 조차도, 똑바로 화면을 응시하며 우리가 누드화를 보면서 누려야할 예술을 빙자한 수준 높은 관음증을 도대체 허락해 주지 않는다. 심지어 이렇게 물어본다. “난 다 벗었다. 그런데 너는?” 아마츄어 모델의 어색함에 대한 안창홍의 유려한 묘사력과 표현력은 그들과 작가 사이의 두터운 신뢰감을 과시하며, 불편한 응시의 벽 앞에서 오히려 정당하게 감상해야 할 감상자들을 안절 부절하게 만든다.

초상의 기원이 이집트의 왕의 죽은 육신을 기념한 신성함에서 비롯되었고, 르네상스와 근대를 거치면서 여러 가지로 의미로 변화되어 왔다고 할지라도, 관능과 관음이 거세된 누드화는 또 얼마나 불편한 것인가. 이 엉뚱하고 개성 강한 모델들은 단지《베드 카우치》시리즈로 명명될 뿐이다. 이들의 익명의 벗은 몸과 똑바른 응시는 교실 뒤에 앉은 불량스러운 - 나쁘지만 그래서 오히려 순수한 - 아웃사이더 안창홍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닐까.

그는 우리가 외면하고 싶어 하는 이 사회의 현실과 개인의 존재 가치를 긴 세월 동안 이야기해 오고 있다. 그 중심에는 역설적인 모양새로 위장 한 따뜻한 애정과 관심이 자리 잡고 있고 있다. 이 정도의 애정 고백이라면 마음이 넘어갈 수 밖 에 없다.

어머니는 좋은 남자를 만나라고 하지만, 이 나쁜 남자가 오랜 세월동안 한결 같이 내미는 한 다발 꽃을 우리는 마다 할 수 있을까? 그가 나쁜 남자일수록 그의 오랜 순정은 더 감동적이니 말이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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