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홍 인터뷰
AHN CHANG HONG ' INTERVIEW

安昌鴻
세상을 향해 내뱉는 화가의 당당한 힘

1980년대 이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안창홍의 그림은 그만의 독특한 회화적 조형어법으로 우리들에게 뚜렷이 기억되어 왔다. 정동석은 이번호 작가 릴레이 작가로 안창홍을 추천했다. 엇비슷한 시대를 살아왔지만 이 두 작가의 성격과 작품 세계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래서 이들의 만남은 더욱 흥미롭고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안창홍(오른쪽)과 정동석(왼쪽)

정동석 저 역시 지난달 김보중 선생한테 받았던 질문을 하 겠습니다.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나요?

안창홍 복잡한 가족사로 유년 시절을 특별하게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경찰 공무원이었고 저는 외할머니와 계모 밑에서 자랐습니다. 어릴 때 심하게 말을 더듬었고 자폐증처럼 세상과 격리된 채 외롭게 지냈습니다. 유일하게 혼자서 놀 수 있는 놀이로 미술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그림 그리기를 통해서 비밀스럽고 격리된 세계로 통하는 입구를 발견한 셈이죠. 친구도 없이 혼자서 침잠된 나만의 세계에서 그림 그리기로 소일하며 지냈습니다. 그 행위는 우울하고 내성적인 아이의 은밀한 고백이었습니다. 이후 청소년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이 있다는 걸 스스로 깨닫고 그림 그리기에 더욱 열중하게 되었습니다.

그림 이외에 다른 일을 생각해 보신적은 없나요.

중학교 시절 한때 음악을 하고 싶었습니다. 특히 악기를 다루고 싶었는데 경제 여건이 따라주지 못했습니다. 또 소설이나 시도 쓰고 싶었습니다. 특히 소설을 쓰기 위해선 부지런 해야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저는 그렇게 부지런하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그림에 더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질문을 받고 생각해 보니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아마도 양아치나 사이비 교주가 되었을 것 같군요. 사실은 지금도 무위도식 하면서 거렁뱅이로 한 일년만 살고 싶은 마음도 있답니다. 삶이란 똑같습니다. 부랑아든 사이비 교주든 화가든 말입니다. 얼마나 그 속에 미쳐서 사느냐가 중요한 거죠.

그림 그리면서 영향을 받은 인물이나 또 다른 무엇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송혜수 선생님이 기억납니다. 그분 한테 화가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배웠습니다. 한편으론 현실이 요구하는 획일적으로 제도화된 미술교육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면서 무가치한 지식과 길들이기에서 해방됨으로써 획득할수있는 자유스러움과 반대급부적의 가치를 많이 느꼈습니다.

그래서 미술대학에 진학하지 않으신 거군요.

제도 자체가 싫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저는 어린 나이부터 독립 생활을 해왔습니다. 학교에서 내 인생과 무관한 것들을 너무 많이 가르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고등학교도 가기 싫어했습니다. 고등학교를 몇 번의 정학과 퇴학을 당하면서도 우여곡절 끝에 졸업을 하긴 했습니다. 비록 어린 나이이긴 했지만 대학이 가지고 있는 허구와 무가치한 교육에 대한 환멸이 있었습니다.

후회는 없으신가요.

전혀 없습니다. 성년이 되어 겪은 미술판은 감상적으로 생각해 왔던 것과는 많이 다르더군요. 정치적이고 학연 등에 얽혀 있었어요. 한편으론 가소롭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 때문에 의기소침해지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조금 불편한점은 있었지만 그런 것 때문에 후회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권력〉 캔버스에 아크릴 227×185cm 1999

그래도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체계적인 미술사나 기법 등 교육을 받지 못한 부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공부는 필요해 지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원치 않고 필요없는 지식만 머리에 잔뜩넣어 기형아가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스스로 체험하면서 깨닫는 게 중요합니다. 나는 내게 필요한 에너지만 흡수합니다. 생각해보세요. 가장 예민한 시기에 미술대학 입시를 위해 밤낮없이 석고 데생만 연습하다가 막상 대학에 들어가면 선생이 하는 첫마디가 그 동안 입시때 배운거 다 잊으라고 말합니다. 이런 미친짓이 어디 있습니까. 나는 그걸 하기 싫었던 겁니다. 허구의 껍데기는 제게 필요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내 삶은 생존의 기로에서 매우 절박했거든요. 돌이켜보면 이런 관점에서 나는 불필요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행복한 겁니까.

얼마 전부터 대학에 강의를 나가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지금은 군대에 가 있는 제 아들이 2년 전 한국종합예술학교 미술원에 입학했습니다. 이때 마침 미술원에서 제의가 왔습니다. 사실 저는 학부형의 입장이어서 거절하기도 미안했고 제 아들을 알고 싶었습니다. 일종의 보상심리이기도 하지만 서로 떨어져 살면서 아버지로서 선배화가로서 제대로 지원해 주지 못한 아픔과 미안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들 또래의 가치관이나 고뇌하고 갈등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저는 교육자는 아닙니다. 오래 할 생각은 없습니다. 체질상 가르치는 것과 그림 그리는 일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없습니다. 교육이라는 것이 지식 전달도 필요하지만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것도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화가로서 겪어온 홀로 서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겐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막상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 책임감도 생기고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화제를 바꿔서 다른 질문을 드리지요. ‘현실과 발언’에 참여하기 전엔 부산에서만 활동하셨나요.

그때 주거지는 부산이었지만 서울의 몇몇 그룹에 참여해 오히려 서울에서 더 빈번히 전시를 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당시는 군사정권 시절로 사회가 어두웠습니다. 견고하고 거대한 폭력 앞에서 너무나 작고 초라한 내 모습과 내 작업의 유효성에 절망했습니다. 이렇듯 무기력한 그림에 대한 회의에 빠져 잠정적으로 활동을 중단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럴 즈음 ‘현실과 발언’에서 제의가 들어와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현발’에 가입하게 되셨나요.

김용태 씨를 통해 제의받았습니다. 그때 저는 〈가족〉 시리즈를 시작할 즈음이었고,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노원희씨가 먼저 추천하고 회의를 통해 결정했다고 하더군요.

그럼 ‘현발’을 떠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공식적으로 탈퇴를 선언한 건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게 된거죠. 일종의 회의를 느꼈습니다. 언젠가부터 모임이 처음 가지고 있던 열정과 정의로움과 순수함을 잃고 안주하면서 또 다른 권력의 양태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더군요. 그때 내 생계수단은 거의 밑바닥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민중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념으로 무장된 민중이 아니고 말입니다. 내 인생의 방식은 집단이나 권력에 안주하거나 움추려들어 던져주는 먹이나 받아먹는 그런것이 아닙니다. 끝없는 치열함으로 자신을 벼랑 끝까지 몰아붙이는 겁니다. 그런면에서 보면 ‘현발’은 안주하고 있었던 거죠.

제가 안 선생을 알게 된 지도 어언 20년이 돼가는데, 마치 거미가 실을 뽑아내듯이 왕성하게 작업해 오고 있습니다. 그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담배를 피우듯이 저는 거의 습관적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모든 에너지가 그림에만 쏠려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상대방의 표정을 관찰하고 내가 그릴 그림을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는 작업을 하면서 얻는 성취감이 저에겐 큰 힘이 됩니다.

살아 있음의 증명

작품에서 드러내는 정신성은 무엇입니까?

내가 생각하는 그림이란 구원이자 절망이고, 순결이며 간통이고, 단맛 나는 빵이면서 배설이기도 한 극과 극의 존재입니다. 해방과 자유인 동시에 감옥이며 저주이고 자기 성찰의 희열, 고독, 반역입니다. 그런가 하면 미래에 대한 비전이고 나와 타자가 만나는 장소이며, 지적 여행을 위한 유일한 공간입니다. 그리고 삶이자 죽음인 동시에 행과 불행의 갈림길에서 때론 스스로 자극 받고 채찍질하며 작업을 합니다. 이런 것들이 나를 존재하게 합니다. 세상에 대한 공격이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방법입니다. 나에게 있어 그림이란 이런 욕구를 분출시키는 도구입니다. 이것은 의무감이 아니라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초기 작품 속에 가족이 많이 등장하는데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남자Ⅰ〉 캔버스에 아크릴 91.5×65cm 1999

제 나이쯤 되는 세대의 가족들은 상처가 많을 겁니다. 개인사를 이야기하는 과정에 가족사진이 선택됐고 1차원적인 것에서 3차원적인 공간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범위가 포괄적이고 역사적인 가족사의 문제로 확대된 겁니다.

어느 순간부터 그림에서 화려한 색채가 강하게 보이는데 무슨 계기가 있었나요.

빛바랜 〈가족사진〉시리즈에서 색연필을 사용한 〈위험한 놀이〉 시리즈를 계기로 화려한색을 쓰게 되었습니다. 제 경우 색의 변화가 작품 판매를 위한 전략이 아니라 내 예술관에 대한 전략의 변화입니다. 현실을 바라보며 색이 변한 겁니다. 플라스틱 장난감이나 말초적이고 싸구려 향수 냄새 같은 천박함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박한 색을 사용해야 그림의 내용과 맞아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제 그림은 전시할 당시는 잘 안 팔립니다. 최소한 4년이 지나서야 팔리기 시작하죠. 예를 들어 지금 열리고 있는 전시장에 찾아와서 4년전 그림을 사겠다고 해요.

사람들에게 안 선생의 그림이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한가 보군요. 그렇다면 작품을 구입하는 사람을 염두에 두고 그림을 그리지는 않나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법입니다. 그림은 철저히 내 것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림에 어떠한 타협도 있을 수 없습니다. 신념이 있는 작가라면 대중을 이끌고 또 다른 차원으로 인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안 선생의 그림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 합니다.

참 많은 사람을 그렸습니다. 부랑아, 창녀, 호색남, 동성애자, 여장 남자, 유한마담, 권력자, 양아치, 어른을 닮은 어린이… 밑바닥부터 상류층까지 많이 그렸지요. 바로 그 사람들 속에 우리의 상처와 고독이 담겨 있는 겁니다. 그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부산에서 서울로 다시 양평으로 거처를 옮기셨는데 작업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부산에서 서울로 옮긴건 모험이었고 유혹으로부터의 탈출이었습니다. 부산에서 한동안 입시미술화실을 운영했는데 처음엔 겨우 끼니를 때울 정도였는데 언제부터인가 돈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간신히 생계유지만 될 때는 몰랐는데 조금씩 생활이 나아지면서 큰 갈등을 느꼈습니다. 내가 미술대학 입시를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살기 위해 그 방법을 택했다는 사실에 대한 회의였습니다. 그건 일종의 사기였습니다. 도저히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이때 모든 걸 과감히 버리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그림을 그리지 못했을 겁니다. 서울 생활 8개월 만에 다시 이곳 양평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11년이 지났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할 수만 있다면 좀더 막가는 그림, 비이성적인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삶의 내장 같은, 그 내장 속의 오물 같은 그림 말입니다. 저는 그걸 똥 같은 그림이라고 표현하고 싶군요. 똥이야 말로 생명의 원천이고 가식이없으며 정말 필요한 것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최근 파리를 그려서 문자로 직접 전달 하는 그림을 그리셨는데?

우리 세상이 파리와 같습니다. 목적을 위해 파리처럼 자유자재로 비행을 하는 곤충은 없습니다. 상하좌우 없이 자유로운 비행이 가능하죠. 그리고 굉장히 집요합니다. 파리를 보면서 우리 삶의 모습과 너무 닮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뒤틀린 권력을 그리고 싶었지요. 다시 말하지만 똥이 권력이라면 그것을 향해 몰려드는 파리의 모습이 우리의 세상이더군요. 권력과 파리의 함수관계를 생각하다 글자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수만 마리 파리의 이미지를 권력으로 바꾼 거지요. 그러다 보니 이 파리의 이미지가 유용하게 사용되더군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정말 큰 화가가 되시리라 믿습니다.
 

정리 | 이준희 | 기자

안창홍은 1952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해 부산 동아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지금까지 15회의 개인전과 다수의 그룹전에 참가했다. 1989년 카뉴국제회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고, 눈빛출판사에서 두권의 그림모음집을 출판 했다. 현재 경기도 양평에서 작업하고 있다.


contents 2001.1 출처: 월간미술